출장 가기 전에 밑반찬

by 배지영


"나 이제 안 먹어.”


강썬님은 오이고추, 삼겹살, 소갈비, 데친 오징어, 감자탕을 앞에 두고 한 번씩 말했다. 며칠 전에는 식탁에 오른 배춧잎을 두고 선포했다. 왜 갑자기 호에서 불호가 되었는지 물어봐서 강썬님의 심기를 불편하게 할 수는 없는 노릇. 강성옥씨는 사다 놓은 상추와 깻잎이 없다며 강썬님에게 고기에 그냥 쌈장만 찍어서 먹으라고 했다.


시가에서 가져온 통배추는 아직 더 있다. 강성옥씨는 자연드림에서 야채를 샀다. 강썬이 좋아하는 꽁치 조림을 하느라 무를 큼지막하게 썰었다. 애매한 크기의 배춧잎에는 양념간장을 버무렸다. “나 이제 그거 안 먹어.”라고 할 만한 반찬이 없는데 강썬님은 맛있게 먹지 않았다.


꽁치 가시를 발라주던 강성옥씨는 눈으로 나한테 이유를 물었다. 큰소리로 일러바칠 수 있는 절호의 기회! “편의점에서 짜장라면하고 체다치즈 팝콘하고 콜라 사 먹었대.” 밥이 맛없어서 그런 게 아니라고 안심한 강성옥씨는 후딱 먹고 식기 세척기에 그릇을 집어넣고 나갔다.

12월에 강성옥씨는 몹시 바쁘다. 25년 전에는 거의 백수였고 안 바빠서 결혼을 했더랬다. 며칠 전부터 강성옥씨는 뭐 먹을 거냐고 뭐 필요한 거 있냐고 물었다. 만날 잘 먹고 있고, 필요한 것도 없고, 둘이 결혼했는데 한 사람이 일방적으로 주는 건 맞지 않아서 그냥 평범하게 지내고 싶었다. 막상 결혼기념일 닥쳐서는 내가 물었다.


“강성옥. 그날 뭐 먹을래?”

“강썬 좋아하는 거?”

“국밥(강썬은 콩나물국밥 좋아함. 나는 별로) 먹자고 하면?”

“가야지 뭐.”


그리하여 우리는 결혼기념일에 국밥을 먹으러 갔다, 는 아니고 돈가스집에 갔다. 시후 지후 형제도 같이. 이 나이에 초등생 세 명을 앞세우고 다니니까 한결 젊어진 것 같았다. 메뉴판을 본 세 아이는 “아무거나.”를 주문했다. 없는 메뉴라서 우리 부부는 읍소한 끝에 세트메뉴(롤치즈돈가스, 우동, 샐러드, 밥)로 시켰다. 지난달까지 우동을 좋아했던 강썬님이 갑자기 “나 이제 우동 안 먹어.”라고 테클을 걸었다.


집에 온 아이들은 줄넘기한다고 집 앞 공원으로 가고, 강성옥씨와 나는 걸어서 한길문고에 갔다. 강성옥씨 회사 워크샵에서 직원들에게 선물로 줄 문상이 필요해서였다. 강성옥씨는 그중에서 수십만 원어치를 뚝 떼어 나한테 줬다. 책 사보라고. 필요한 거 없다고 단호하게 나왔던 사람 맞어? 오, 예! 나는 환호했다.


2박 3일짜리도 출장은 출장. 강성옥씨는 집에 오자마자 손을 씻고 텔레비전을 켜고 소분해놓은 멸치 한 봉지를 냉동실에서 꺼내 큰 쟁반과 큰 그릇을 챙겼다. 드라마를 보면서 멸치 손질하는 모습을 찍으려고 다가갔더니 또 저리 가 있으라고 했다. ‘강성옥이! 너는 파리하고 결혼했냐? 왜 손으로 쫓아내고 난리야?’ 내 자랑 같지만, 속으로만 말해서 가정불화를 막았다.


강성옥씨는 멸치볶음을 만들었다. 레시피 좀 알려 달라니까 멸치볶음에 무슨 레시피가 필요하냐고 오히려 나한테 물었다. 기술 가진 자의 유세에 눌려서 나는 한 발 뒤로 물러섰다. 강성옥씨는 냉장고와 뒤 베란다를 점검했다. 집을 비울 동안 걱정되는 식재료는 배추인 듯싶었다. 배춧잎을 싹둑싹둑 썰어서 물에 데쳐서 배추나물을 무쳤다. 마치 사진 찍으라는 듯이 보기 좋게 글라스락에 담아놓았다.

어떻게 딱 그릇에 맞게 음식을 하지? 대단한 자제력이라고 탄복했다. 우리 엄마나 큰 시누이는 멸치볶음이나 배추 나물도 어마어마하게 해서 대용량 김장김치 통에 담을 텐데.ㅋㅋㅋㅋㅋ 음식 할 때 손이 큰 건 전라도 사람들의 유전자. 강성옥씨가 ‘물보다 진한 피의 길’로 가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아침에 일어나서 로봇청소기를 한 번 싹 돌린 강성옥씨는 떠났다. 제주도 풍경 사진을 식구 넷이 있는 메시지 단체방에 보내고는 다음에 같이 오자고 했다. “좋다!!!” 댓글은 나만 달았다. 아침에는 바다 사이로 뜨는 장엄한 일출 사진을 보냈다. 아름다운 풍경을 놓치지 않고 기록한 강성옥씨에게 “밥걱정 안 하니까 좋지?” 라고 물었다.


“아니. 걱정하고 있어.”

“왜 걱정해?ㅋ”

“강썬 밥은 먹는지.”

“아빠 없다고 굶을까 봐서?”

“엉.”


참나. 강썬은 학교에서 똥 마려울까 봐 평일에는 아침밥 안 먹었다. 그제까지. 어제부터 편의점 삼각김밥 먹으며 등교하는 게 진정한 초등학교 6학년의 ‘형아미’라는 걸 알게 됐다. 나는 뭐 더 말할 것도 없다. 아침에 자매님이 단호박죽 끓였다며 황송하게도 집 앞까지 가져다 줬다.



** 잡담 - 강성옥씨의 출장 준비에서 세월을 실감함. 그전에는 멸치볶음과 나물 한 가지로 끝내지 않았다. 장조림, 오이소박이, 가지나물, 진미채 볶음, 사골국, 김치찜, 카레 등등을 만들었다.


나도 강성옥씨에게 결혼기념일 금일봉을 보냄. 마침맞게 시사기획 창 출연료가 입금됐다. 거기에 조금 더 보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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