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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지영 May 10. 2022

함께 둘러앉아 먹지 않아도 추억

홍어삼합


아빠는 증조부모 손에서 자랐다. 형제자매도 없다. 그러니 우리 자매들은 명절마다 토방에 앉아서 윗동네로 올라가는 남의 집 친척들을 바라보았다. 꼭대기에 있던 해가 기울기도 전에 외로움의 함량은 높아졌다. 9남매의 큰딸로 자란 엄마는 벽장에 넣어둔 종합과자선물세트를 꺼내서 명절 특유의 침울함을 걷어냈다. 좋아하는 것만 쏙쏙 골라 먹어도, 어린 마음에 드리워진 막연한 그리움은 가시지 않았다.


 강성옥씨는 자손이 번성한 종가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명절에는 친척들이 진짜 많이 왔다. 맨 뒷줄에 선 아이들은 제사상에 절하는 어른들의 엉덩이에 밀려서 벽에 딱 붙어버릴 정도였다. 그래도 신나기만 했단다. 아무 때고 부엌에 들락거리면서 기름기 자글자글한 음식을 집어 먹었고, 친척들에게 세뱃돈과 용돈 받는 시간을 기다렸다. 그런 날에 외로운 사람이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해본 적 없이 자랐다.


 합쳐서 백 살 넘은 우리 부부가 느끼는 명절은 비슷해졌다. (도맡아 하지 않아도) 제사 음식 준비와 용돈을 줘야 하는 조카들과 조카손주들을 생각하면 외로움은 감히 끼어들지 못한다. 다정하면서도 소란스러운 시가와 친정에서 고요하게 있을 수도 없는 노릇. 크게 하는 일도 없는데 왜 힘이 들까. 어서 우리 집으로 돌아가서 깨끗하게 씻고 눕고 싶었다.


 코로나는 온 나라 사람의 명절을 조붓하게 만들었다. 우리 시가도 친척들 없이 직계 가족끼리만 제사를 지낸다. 닷새나 되는 설 연휴, 명절 당일에는 시가에서 보내고, 전날에는 영광 친정에 가기로 했다. 우리 아이들은 대대로 지켜온 전통을 그대로 따르고 싶어 하지 않았다. 큰애는 데이트하러 나가고, 작은애는 집에 남아서 게임을 하고 싶어 했다.


 “자식들은 다 그러코 크는 거여. 건강하기만 하믄 되제. 억지로 데려오지 마야.” 전화로 사정을 들은 엄마는 괜찮다고 했다. 할 수 없이 우리 부부만 집을 나서려는 참에 강성옥씨 친구가 하얀색 스티로폼 상자를 갖고 찾아왔다. 홍어였다. 머리가 따로 없이 몸뚱이에 눈코입이 달린 홍어는 얼음 사이에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웬만한 음식을 할 수 있는 강성옥씨에게 날것 그대로의 홍어는 알아서 잡아먹으라고 준 돼지 한 마리나 소 한 마리와 같았다. 그대로 실온에 두면 상할 수 있으니까 홍어를 상자째 들고 시가로 갔다. 마당 빨랫줄에는 껍질을 벗긴 홍어가 걸려 있었다. 꼬들꼬들하게 말린 다음에 모양이 흐트러지지 않게 쪄서 제사상에 올릴 모양이었다.


 “홍어 있는데, 홍어를 또 가져왔어?”


 큰시누이는 우리가 가져온 스티로폼 상자를 열었다. 홍어를 집어 올리는 두툼한 시누이의 손은 그리운 시아버지의 손과 꼭 닮아 있었다. 홍어의 신선도를 품평할 수 있는 눈을 가진 시누이와 홍어의 미끄러운 ‘꼽’ 때문에 차마 만지지 못하는 내가 동시에 떠올리는 사람은 같았다. 돌아가신 아버지처럼 선하게 웃는 큰시누이가 말했다.

 

“배지영이, 나 결혼하기 전에 아버지가 홍어를 어떻게 했는지 알아? 두엄자리 있잖아.  (웃음)비닐을 씌워서 거기에 묻어서 삭혔어. 요즘 그렇게 하면 누가 먹어? 나는 항아리를 깨끗이 씻어서 말린 다음에 짚 착착 넣고 홍어를 넣어서 딱 밀봉해 놔. 많이 삭힐라면 쫌 오래 놔두면 되는 거여. 삭히는 놈은 내장만 빼내고 껍질을 안 벗겨.”


 삭힌 홍어에 묵은지와 삶은 돼지고기를 싸 먹는 전남 나주 지역의 홍어삼합이 전국에 알려진 건 1980년대 이후라고 한다. 음식을 잘하던 우리 시아버지는 미래를 내다본 사람처럼 홍어를 삭혔다. 그러나 서해를 낀 군산 지역 사람들은 갓 잡은 홍어를 손질해 썰어서 무치거나 회로 먹는 것을 선호했다. 싱싱한 홍어일수록 껍질 벗기기가 힘들어서 펜치를 사용했다고 한다.


‘날아가는 새도 투망으로 잡았다.’는 전설을 남긴 아버지는 동네 끝에 있는 만경강 하구에서 숭어, 망둥어, 전어를 직접 잡았다. 마당에서 회를 떠서 식구들 먹이고 때로는 시내 사는 친구들까지 초대했다. 날것을 입에 대기 싫어했던 아버지의 막내아들은 살살 녹는다는 회 앞에서 돼지고기를 찾았단다. 지금도 강성옥씨는 회를 좋아하지 않는다. 특이하게도 홍어회는 먹는 편이라서 큰시누이한테 자신의 목적을 밝혔다.


 “누나, 처갓집 갔다가 저녁에 들를 테니까 홍어회 떠 놔. 몇 점만 갖고 갈 거야.”


 친정에 갔더니 밥상에 홍어회무침이 올라왔다. 제철이니까 집집마다 자식 기다리는 어머니들이 홍어를 샀을 것이다. 그런데 전라도 바깥사람들은 전라도 사람들이 모두 삭힌 홍어를 좋아하는 줄로 안다. 내가 자란 전남 영광에서는 홍어를 삭히지 않았다. 전북 군산의 우리 시가처럼 홍어를 쪄서 제사상에 올리지도 않았다. 회갑이나 곗날에는 꼭 먹는, 빠져서는 안 될 음식이긴 했다.  


 변소 냄새가 난다는 삭힌 홍어 이야기는 고등학교 3학년 2학기 중간고사 때 알았다. 출출한데 한밤중이라 분식집은 모두 문을 닫았다. 술과 안주, 그리고 국수를 파는 포장마차에 들어갔다. 아저씨들은 불콰한 얼굴로 암모니아 냄새가 올라온다는 삭힌 홍어 이야기를 했다. 떡볶이나 돈가스에 열광하던 학생에게 홍어삼합은 상상조차 하기 싫은 괴식이었다.


 모든 음식을 골고루 잘 먹는 집안에서 태어나 가리는 게 없는 엄마도 삭힌 홍어는 마흔 살 넘어서 접했단다. 외가는 주로 홍어를 쪄서 먹었다. 싱싱할 때는 회로 떠서 실컷 먹었는데, 하필 우리 아빠는 날것을 보면 인상부터 쓰는 ‘나약한’ 남자였다. 외할아버지는 스물한 살에 시집보낸 큰딸이 친정 오는 날에 커다란 홍어를 미리 사놨다고 했다.


 “결혼하고는 친정에나 가야 홍어를 먹었제. 느그 외할머니는 별 양념을 안 하고도 진짜 맛있게 만들었씨야. 된장에다가 막걸리로 만든 초를 쪼까 쳐서 먹었다이.”


 부모님의 결혼 생활 50여 년. 아빠는 이제 음식 앞에서 까탈을 부리지 않고 골고루 먹으려고 애쓴다. 엄마가 일하러 갔다가 올 시간에 맞춰 쌀을 씻어서 안치고 청소를 하고 아내의 기분을 살핀다. 자식들한테는 바라는 거 하나 없는 엄마는 세월이 갈수록 아빠한테만 점점 엄격해지고 있는 게 아니러니이긴 하지만.  


 설거지를 마친 엄마는 세뱃돈 봉투 네 장을 내밀었다. 손주들뿐만 아니라 딸과 사위 것까지 준비했다. 안 받으면 엄마가 서운해하니까 고맙다면서 받았다. 아빠는 조막둥이(나보다 한 살 많은 막내이모)한테 받은 용돈 자랑을 했다. 엄마는 그 대목에서 버럭 화를 냈다. ‘애기들’이 힘들게 번 돈을 왜 받느냐면서. 참고로 엄마의 신념은 특별한 날에도 자식들한테 용돈을 받지 않는 거다.   


 궁지에 몰린 듯한 아빠는 난데없이 서류 봉투를 가져왔다. 위기에서 벗어나려는 어린이 같은 아빠 태도를 응원했다. “뭐야? 우리 아빠 잘한 거 있나 보네.” 아빠 혼자서 서류를 준비하고 접수에 성공했다는 증명 봉투에는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라고 쓰여 있었다. 그 순간 가슴에서 뜨거운 게 치받혔다.  


 우리 할아버지 배희근씨는 군경에 의한 민간인 희생자. 1948년 8월, 겨우 스물두 살에 돌아가셨다. 그해 초봄에 태어난 아빠는 당신 아버지의 그림자조차 본 적 없다. 증조할머니는 젊은 며느리를 재가시키고 큰아들의 유일한 핏줄인 우리 아빠를 애지중지했다. 먹을 게 풍족하지 않던 시절에도 편식을 허용하고 귀한 것만 먹였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산골에서 광주로 유학 간 아빠는 학교 게시판에 1년 내내 이름이 붙어 있을 정도로 공부를 잘했다. 그러나 ‘빨갱이 자식은 면서기도 못 된다.’는 벽 앞에서 나아가지 않고 포기했다. 일찍 결혼한 아내에게 기대서 평생을 살고 있다.  


 편식은 시간이 지나면 자연치유 되기도 한다. 생김새나 색깔, 냄새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등의 이유로 거부하던 음식을 어느 순간부터 받아들인다. 만든 사람의 정성, 곁에 있는 사람들의 분위기를 고려해서 맛을 음미하며 수더분하게 먹는다. 그토록 저어했던 음식을 특정한 철이나 특별한 감정이 들 때마다 먹고 싶다고 난리까지 친다.


 그러나 우리 집 늦둥이 강썬은 시간이 필요한 열네 살. 익히지 않은 게 싫고, 핑크색에 선홍색인 색깔도 마음에 안 든다며 홍어회를 먹지 않는다. 즐거워야 할 명절에 강썬이 음식으로 투덜거리는 건 집안의 근심. 강성옥씨는 재어놓았던 갈비를 굽고 부족해 보였는지 목살까지 구웠다. 홍어회와 묵은지와 돼지고기 수육도 준비했다.


 나는 엄마가 새로 담가준 김치에 홍어와 수육, 그리고 양파까지 곁들여 몇 점 먹었다. 종가의 막둥이로서 음식의 호불호를 밝히며 자란 강성옥씨의 젓가락은 홍어회보다는 육고기 쪽으로 움직였다. 자정 넘어 들어온 큰애는 진짜 미식가. 냉장고 속 홍어회를 보고 반색했다. 혼자서도 제대로 차려 야무지게 홍어삼합을 먹었다. 맞은편에 앉은 나는 옛날에 우리 엄마가 그랬던 것처럼, 큰애를 흐뭇하게 지켜보았다.  


 둘러앉아 함께 먹지 않은 음식도 기억 속에 저장된다. 나는 엄마가 권하는 날것들을 질색하며 자랐다. 형편이 어려워도, 남편이나 새끼들은 입에 대지 않는 홍어를 먹고 싶었던 엄마는 혼자 장에 가서 커다란 놈으로 사 왔다. 부위 별로 큼지막하게 썰어서 회로, 갖가지 야채와 식초를 넣어서 무침으로, 적당히 말려서 찜으로 먹었던 젊은 우리 엄마는 너무 멋졌다.  


 “잘 먹었응게 지금까지 내가 건강하제요. 밥맛은 떨어져 본 적이 없씨야. 명절 대목 닥쳐서 날 새고 굴비를 엮고 힘들어도 밥이 항상 맛있다이. 살도 안 찌잖아. 많이 먹으믄 일을 못 한 게 딱 정량만 먹는다이.” 


  일하고 맛있게 먹고 여전히 삶을 씩씩하게 꾸려가는 어른들이 자기 자랑으로 끝나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게 좋다. 먹는 일에 관심을 쏟은 적 없고, 복스럽게 먹지 못하는 나도, 과거에서 현재까지 이어지는 음식 얘기에 욕심이 생긴다. 과연 우리 아이들에게 아빠 음식 말고, 엄마만의 멋짐이 스며있는 음식 이야기를 하나쯤 물려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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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어삼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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