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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지영 May 24. 2022

겨울잠 자고 일어난 상추가 넘쳐날 때

상추 겉절이

길거리에서 새삼 나이듦을 실감한다. 찬바람 불 때 냄새로 발걸음을 붙드는 붕어빵, 휴일 오후에 아파트 건너편 공원 어귀에서 파는 타코야끼에 마음이 동하지 않는다. 강썬 유치원 다닐 때 먹어본 게 마지막인 것 같다. 밤 10시 넘어서 하루를 마치고 떡볶이, 어묵, 오징어 튀김 파는 포장마차를 도장 깨기 하듯 들르던 습성은 고등학교 때 절정이었다.


 야자하니까 도시락을 두 개씩 들고 다녔다. 한 반 정원은 68명, 식사 시간에 맞춰 밥을 먹는 학생은 드물었다. 쉬는 시간마다 알아서 도시락을 까먹었다. 봄이 오면 일제히 꽃이 피듯이 도시락 반찬도 간장과 식용유에 달달 볶은 마늘종이나 양파와 감자였다. 수업 들어오는 선생님들은 훈계와 당부와 짜증과 안쓰러움이 섞인 한 마디를 했다.


 “이놈들아. 밥 먹으면 창문 좀 열어!”


 틀 안에서 옴짝달싹 못 하니까 사소한 것에서 파격을 꿈꾸던 고3 교실. 짜란! 누군가 ‘시커먼 봉다리’에 엄마가 새벽에 뜯었다는 상추를 씻어서 기져 왔다. 멸치볶음, 김치볶음, 어묵볶음, 김자반, 콩자반, 소시지 부침, 달걀말이가 줄 수 없는 신선함이었다. 며칠 뒤에 어떤 애는 상추를 둥근 플라스틱 소쿠리에 씻어서 분홍 보자기에 싸 왔고, 한여름에는 오이나 풋고추도 친구들의 도시락 가방에서 자연스럽게 등장했다.


 시골에서 상추는 상품작물이 아니다. 순수하게 식구들끼리 먹고살기 위해 길렀다. 대차게 뜯어서 겉절이와 쌈으로 먹어도 초기화되지 않는 작물이었다. 볕, 바람, 물, 거기에 밭 주인의 발소리가 더해진 상추밭은 며칠 만에 파릇파릇 야들야들해졌다. “오메! 해준 것도 없는디 저 혼자 또 요로고 실하게 자란당게는. 오져 죽겄어.” 어머니들의 상추 칭송은 타당했다. 한겨울 빼고 늘 밥상에 올랐으니까.

 상추밭을 잊고 사는 도시의 삶. 그래도 우리 큰시누이한테 상추 ‘쪼끔’ 뜯었다는 말을 들을 때는 생협 냉장고에 진열된 한 웅큼의 채소를 떠올리지 않는다. 시장의 야채 상인들이 쓰는 전문적인 대용량 비닐 봉투를 기본 단위로 여긴다. “별로 안 많아. 강썬 이모네도 주고, 강썬 친구네도 줘.” 텃밭 농사만 짓는 큰시누이가 뜯어온 상추는 내다 팔아도 될 만큼 압도적이었다.


 치킨과 햄버거를 좋아하는 강썬은 상추쌈을 먹을 때 예스럽다. 고기 안 넣고 상추에 밥과 쌈장만 올려서 먹는 걸 제법 즐긴다. 그런데 상추에 양념을 해서 버무린 상추 겉절이는 안 먹는다. 한 장씩 집어 먹느라 손에 생기는 물기를 처리하지 않아도 되고 식감도 그대로인데, 싫다고 할 게 뭐람. 아이들에게 편식을 허용하는 강성옥씨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양파전을 따로 부쳤다.


 끼니 때마다 먹어도 냉장고 야채실에는 상추가 가득했다. 강썬 친구들이 우리 집에 와서 1박 하는 날에 상추는 밥상에 오르지 못했다. 한 달 만에 자러 온 아이들은 당연히 밥을 먹고 싶어 하지 않았다. 편의점 라면, 치킨, 햄버거를 원했다. 아이들이 먹고 일어난 자리에는 패스트푸드에 딸려온 음료 컵과 포장지가 수북하게 쌓였다.


 “치우고 놀아야지.” 강성옥씨는 한 마디만 했다. “네!” 듣는 것만으로 힘이 나는 대답 소리. 디지털 기기 앞에서 언행일치에 어려움을 겪는 아이들을 다그쳐봐야 소용없다. 별수 없다고 생각하는 강성옥씨는 담담하게 거실 테이블을 치우고 부엌으로 갔다. 수전에서 물 쏟아지는 소리가 났다. 나도 따라갔다.

 우선 상추. 시들기 전에 해치우려는 모양이었다. 그는 상추를 아주 많이 씻어서 양념을 만들어 버무렸다. 어쩐지 자신 없다면서도 뚝배기를 꺼내 강된장을 만들었다. 열무 물김치와 강된장으로 열무 비빔밥을 차렸다. 군침이 돌만도 한데, 아이들은 위층 시후네로 올라갔다. 자칭 소하고 같은 수준으로 풀을 먹을 수 있다고 주장했던 나는 커다란 접시에 가득 담아냈는데도 양푼의 반을 차지하고 있는 상추 겉절이를 보고 패배를 직감했다.


  우리 식구는 중학교 발표 나고부터‘더블유 미들스쿨 불행서사’에 잠식되었다. 밥이라도 맛있게 먹고 싶다는 강썬은 식탁에서 게임 채널을 켰다. 차라리 다 같이 보고 한 마디라도 주고받을 수 있는 영화 리뷰, 과학, 역사, 교양 콘텐츠를 한 편씩 선택하라고 부탁했다. 낙오자처럼 혼자만 먼 학교에 다닌다는 강썬의 우울감은 친구들이 자러 오는 날에 싹 걷혔다.

 

 “강썬이 그러더라. 한 달에 한 번은 무조건 친구들 데려와서 잘 거래. 어쩌지?”

 강썬 없는 데서 강썬 얘기를 꺼내려니까 찔렸다. 강성옥씨는 내내 같이 있었으면서도 대화의 주제를 파악하지 못했다.

 “뭐가?”

 “아니. 쫌 불편해서. 안방 화장실에서 샤워해야 하고. 브래지어도 하고 있어야 하고.”

 “애들이 몇 번이나 자겠어. 1년에 많아야 10번이야.”


 가끔씩 친구 데려와서 자던 제규도 성인 되고 나서는 (코로나 핑계 대고) 동네 호텔을 잡아서 밤새 게임하고 새벽에는 공원에서 운동하는 인증사진을 보내왔다. 그렇다면 강썬도 부모 눈앞에서 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나중에는 아이들이 북적이던 이 시간을 그리워하게 될 거다. 강성옥씨 말은 너무나 맞는 말이어서 나는 대꾸하지 못하고 열무 비빔밥과 상추 겉절이에 집중했다.



 “배지영, 뭐 먹을 거야?”

 산책가자고 하니까 잠 덜 깨서 안 된다는 강성옥씨가 물었다.

“강썬도 없는데, 간단하게 먹자. 어제 남은 상추 겉절이 먹을게.”

 친구들이랑 우리 집에서 1박 한 강썬은 시후네 가서 안 내려왔다.

“대충 먹으면 안 되지. 기다려. 상추 많으니까 고기 굽는다.”

 강성옥씨와 둘이서만 맞는 고요하고 덤덤한 일요일 아침. 메뉴는 열무 물김치, 두부김치, 양파김치, 파김치, 마늘종 볶음, 상추 겉절이, 고기 몇 점, 상추 많이. 강썬이 독립하고 나면 우리 부부가 먹게 될, 지지고 볶은 음식이 별로 없는 ‘미래의 밥상’이었다. 아내한테만 엄격하게 식사 지도를 하는 강성옥씨는 고기 안 넣은 탐스러운 내 상추쌈을 지적했다.


 우리 식구 중에서 나만 1일 3식 한다. 강제규는 대학 가면서 아침을 안 먹고, 강썬은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학교에서 배 아플까 봐 아침 안 먹고, 강성옥씨는 원래 1일 2식주의자다. 그런데 강썬이 독립하고, 자신도 은퇴하면 1일 3식 차릴 거란다. ‘백수 세끼’라면서. 나는 안 웃었다. 대신 강성옥씨가 한 번도 들어보지 않았을 신기한 이야기를 해줬다.


 상추는 겨울잠을 잔다. 우리 식구가 며칠간 먹은 상추는 개구리나 곰처럼 겨울잠 자고 일어났다. 지난가을에 파종한 상추는 싹이 조금 올라온 채로 겨울나기를 했다. 비닐하우스를 안 쳤으니까 눈 속에 파묻혀서 찬바람을 맞았다. 바람 끝이 부드러워지고 볕이 따스해지는 봄에 쑥쑥 자라서 또록또록한 자기 색깔을 되찾았다.  


 겨울잠 자는 상추 얘기는 큰시누이한테 처음 들었다. 노지에서 추운 겨울을 이겨 낸 상추 사진을 받아보고 나서 대농의 큰딸로 태어나 외할아버지의 ‘농사 파트너’로 자란 사람이 떠올랐다. 빈 땅만 보면 배추나 무를 가꾸고 싶어 애가 닳는 엄마한테 전화를 걸었다.


 “상추씨를 가을에 뿌린 게 겨울잠을 잔다고 할 수 있제. 옛날에는 눈이 얼마나 많이 왔냐이. 그러코 추운 디서 얼어 죽은 데끼 있다가 봄 되믄 딱 상추 노릇을 한다이. 그때는 시장에 나가서 뭐 사다 먹기나 했가니. 한겨울만 아니믄 뜯어 먹었씨야. 상추가 지 할 도리를 해준 게 고마웠제.”


 시골에서 자랐는데 왜 이토록 기특한 상추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을까. 비닐하우스에서 예쁘게 자라 마트의 상품이 된 상추보다 아삭한 식감이 살아있고 냉장고에 넣어놔도 오래 버티는 겨울잠 잔 상추를. 사시사철 자라는 것 같아도 계절마다 심는 상추가 따로 있다는 것을. 지난날의 무지를 뉘우치며 이맘때 시골에서 먹던 상추 겉절이 레시피를 조사했다.


 큰시누이 강현숙씨 - 자기 입맛대로 해야지. 간장에 파 썰어 넣고, 깨소금도 갈아 넣고, 마늘도 넣고, 참기름도 치고, 당근도 있으면 넣고 버무려. 간장 양념 미리 해 놨다가 찌끄러서도 먹고. 양념장은 간장에 달래 쫑쫑 썰어서 넣고, 매실 액기스 쪼끔 치고, 파 쪼끔, 마늘 쪼끔 넣고 만들지. 물기 없이 상추 겉절이 할라면 맛소금이나 가는 소금에 양념 하고.


 우리 엄마 조금자씨 - 간장 쪼까 치고, 참기름 쪼까 치고, 마늘 쪼까 넣고 휘이 젓으면 끝나야.


 강성옥씨 - 간장, 참기름, 통깨, 고춧가루, 마늘, 양파를 조금씩 넣고 양념 만들어서 상추에 뿌려.


 양념을 설설 버무려서 먹는 상추 겉절이. 레시피마다 나오는 ‘쪼끔’‘쪼까’‘조금’의 용량을 내가 체득하는 날이 올까. 동생 배지현은 길치한테 길 알려주는 것처럼 나한테 상추 겉절이 설명하는 게 막연하다면서 상추를 씻어 탈탈 털어 물기 제거하는 것부터 시작했다. 그러나 생존에 직결되는 게 아니라면 하지 말라고 했다.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음식도 버리게 되고 설거지도 많이 나와서 일거리만 늘어. 그냥 하던 일이나 잘해.”


#남편의레시피

#사계절출판사

#상추겉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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