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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지영 Jun 04. 2022

단만, 신맛, 짠맛, 쓴맛, 감칠맛에 더해진 맛 하나

그리움의 맛 - 무나물

    

 우리 집 식구들은 겨울잠 자는 개구리나 곰이 아니다. 날씨가 쌀쌀해진다고 체중을 억지로 늘릴 필요는 전혀 없다. 자고 일어나면 아침에 먹을 게 있나, 닥쳐올 겨울을 어떻게 날 것인가 걱정하며 눈앞에 보이는 것을 닥치는 대로 흡입하지 않아도 된다. 원래 대로 먹어도 강썬은 자라고, 분하게도 나는 둥글둥글한 아주머니가 되어가고 있다.


 언제나 식생활의 변수를 불러오는 사람은 강성옥씨. 치즈를 많이 넣고 만든 치덕치덕한 그라탱에 식구들이 열광하니까 자만에 빠진 것 같았다. 며칠 동안 주재료를 바꿔가며 치즈 듬뿍 넣은 요리를 만들었다. 일요일 오전에는 떡강정과 가래떡 그라탱을 동시에 차렸다. 내 자랑 같지만, 먹는 걸로 불평하는 일은 여섯 살 때 증조할머니한테 밥그릇을 빼앗기고 나서 고쳤다.


  ‘언젠가는 나도 강성옥씨처럼 D라인이 되고 말겠지.’ 그라탱을 주구장창 먹는 동안 막연했던 짐작은 손에 잡히는 옆구리살로 확실해지고 있었다. 식사 끝나고 조금이라도 움직이려 애썼다. 음식물 쓰레기 버리러 간 김에 차가운 밤바람 맞으며 아파트 단지를 2,000보쯤 걸었다. 고칼로리 음식은 내 몸에 축적되겠지만, 마음만은 아주 조금 가벼워졌다.  


 “아빠, 밥 줘라. 밥으로 그냥 먹고 싶다. 사골국에 파 많이 넣어가지고.”


 우리 집 최고존엄 강썬은 견디지 않고 요구했다. 강성옥씨는 아들의 주문을 머릿속에 입력하면서 부엌 옆 베란다 문을 열었다. 김장 직후라 텃밭 농사 짓는 큰시누이가 챙겨준 게 많았다. 마치 모든 밭작물의 주인공이나 되는 것처럼 스포트라이트를 독점하는, 둘둘 말린 신문지 속에 든 배추를 흘낏 봤다가 무를 꺼내왔다. 생채, 나물, 깍두기, 소고기뭇국, 갈치 조림, 국물용 육수 등으로 쓰이는 무는 강성옥씨가 자주 쓰는 식재료 중의 하나다.


 빠르고 고른 칼질 소리가 났다. 처음 만났던, 스물네 살 청년 강성옥씨도 칼질을 잘했다. 후배들과 살던 그는 양팔을 뻗으면 꽉 차는 좁은 부엌에서 순식간에 오이 냉채와 감자볶음을 만들었다. 너무 시어서 입에 침이 고이고 저절로 인상까지 쓰게 만드는 김치는 양파를 듬뿍 넣고 볶았다. 별거 없는데도 여럿이 둘러앉아 먹으면 맛있었다.


 내가 처음 자취방에 냉장고를 들였을 때, 강성옥씨는 장을 봐왔다. 커다란 볼과 채반도 없는데 생채와 배추김치를 뚝딱 담가주었다. 종종‘우렁각시’처럼 국을 끓여놓거나 밑반찬을 만들어주고 갔다. 그가 조리도구에 대해 품고 있는 ‘장비빨’욕망은 결혼하고서 드러났다. 채칼은 동네 그릇 가게 쇼핑으로 만족 못 하고, 홈쇼핑과 인터넷쇼핑까지 기웃거렸다. 복잡하고 날카롭게 생긴 칼날에 손을 크게 베이고 난 뒤부터 도마와 칼만 쓰고 있다.  


 강성옥씨가 채칼에 집착한 이유는 건사해야 할 처자식 때문이었다. 제규와 선규는 어려서부터 생채 비빔밥을 좋아했다. 맛있는 생채가 냉장고에 있는 날에 강성옥씨는 끼니 걱정을 덜 하는 것 같았다. 너무 바빠서 집에 못 들르는 저녁에는 달걀 프라이 해서 생채 비빔밥 해먹으라고 당부했다. 막냇동생의 딱한 사정을 너무나도 잘 아는 큰시누이는 초대용량 김치통에 꽉꽉 눌러 담은 생채를 주며 말하곤 했다.


 “배지영이, 이거 안 많어. 싱겁게 했으니까 강썬 이모네도 주면 되지. (웃음) 저녁에 성옥이 올 때까지 기다리고만 있지 말고 강썬이랑 참기름 넉넉하게 넣고 비벼 먹어.”


 큰시누이의 생채는 익을수록 새콤해진다. 강성옥씨는 처음부터 그렇게 만든다. 무를 채 썰어서 소금으로 숨을 죽이지 않고 소금물에 담갔다가 물기 쭉 짜내고 양념에 버무린다. 그때 식초도 넣는다. 콩나물무침에도 식초가 들어간다. 차려주는 음식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 편이지만 한번은 이유를 물어봤다. “배지영이가 새콤한 맛을 좋아해서 그러잖아.” 생채 레시피에 어울리지 않는 몹시 달달한 대답을 듣고 말았다.   

  

    

 드디어 강썬이 주문한 대로 파 많이 넣은 사골국이 식탁에 올라왔다. 치즈 이불을 덮은 그라탱도 우리 식구들한테 처음 선보이는 것처럼 또 올라왔다. 강성옥씨가 고칼로리 음식을 이토록 사랑할 리는 없다. 아마도 치즈 유통기한이 임박한 거겠지, 라고 생각하며 나는 곱창 김에 밥을 먼저 쌌다. 마늘장아찌, 호박전, 생채도 공평하게 한 번씩 먹으려고 했지만, “이건 살 안 찔 거야.”라는 안도감을 주는 무나물 쪽으로 젓가락이 갔다. 달큼하고 개운한 무나물은 지나간 어느 한때로 나를 데려다주었다. 아니다, 끌고 갔다.


 1995년 겨울, 그러니까 강성옥씨도 우리 제규처럼 멋지고 잘생긴 청년이었을 때였다. 부모님이 일 보러 시내로 나가자 바로 나한테 전화를 걸었다. 집에 아무도 없다며 밥 먹으러 올 수 있냐고 물었다. 추웠고, 대낮인데도 바깥은 침침했고, 움직이는 게 너무 귀찮아서 나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밥해 줄게. 동생이랑 같이 와.”


 나는 동생 지현과 둘이 자취하고 있었다. 추석 때 엄마 집에 갔다 왔으니까 몇 달 동안 집밥은 구경 못 했다. 흔하게 먹던 된장국이나 김치찌개, 접시에 푸짐하게 담은 나물 한두 가지, 기름진 게 있어야 하니까 양파나 감자라도 볶은 음식이 올라온 밥상에 앉아 별말 없이 먹고 싶었다. 먹고 있는데도 더 먹으라고 권하는 ‘어른’의 잔소리가 간절했다.


 우리 자매는 자취방 앞에서 12번 버스를 탔다. 우리가 자란 산골과는 다르게 넓은 들이 펼쳐진 동네. 몇 번째 정거장에서 내려야 하는지 세지 않아도 괜찮았다. 종점에서 내려서 100미터 정도 가면 닿는 점빵이 강성옥씨네 집이었다. 옛날식 한옥 마루에 거실을 들여 보일러를 깔고, 방 하나를 터서 입식 부엌과 수세식 화장실을 만든 집안은 따뜻했다.


 강성옥씨는 우리 자매보고 거실에 있으라고 했다. 자기는 밭에 묻어두었다는 무를 꺼내러 양푼을 들고 나갔다. 우리 자매는 차가운 두 손을 엉덩이로 깔고 앉아서 벽을 봤다. 강성옥씨 가족의 역사를 한눈에 보여주는 액자들이 걸려 있었다. 갓 쓰고 도포 입은 할아버지의 사진을 보며 강성옥씨와 닮은 점을 찾아보려고 했다.  


 그때 무를 꺼내는 사이에 눈을 뒤집어쓴 강성옥씨가 가게 문 사이로 보였다. 외투도 안 입은 그는 머리에 쌓인 눈만 대충 털어내고 들어왔다. 지현이 일어나서 뭐 도와줄 거 있냐고 물었다. 강성옥씨 답은 처음과 똑같았다. “그냥 앉아서 쉬어.” 그는 우리 자매들이 어색해하면서 오래 기다릴까 봐 빠르게 칼질을 했다.


 강성옥씨는 박대를 굽고, 호박전을 부치고, 소고기뭇국을 끓이고, 무나물을 해서 밥을 차렸다. 속부터 뜨뜻해지는 음식이었다. 진짜로 우리는 별말 하지 않고 먹는 데만 치중했다. 어릴 때 먹고 자란 박대구이도 익숙했고, 무나물은 눈물 날만큼 맛있었다. 편식을 하는 편인 우리 자매는 소고기뭇국의 고기는 그대로 남겼다.


 후식으로 사과를 먹는 사이에 눈은 폭설로 변했다. 도로와 논밭의 경계마저 희미해져 버렸다. 밤이 되려면 아직 시간이 남았는데 해 질 녘 같았다. 오도 가도 못하게 될까 봐 서둘러 집에 가려고 외투를 입었다. 인터넷도 없던 때였는데, 재를 넘지 못하는 12번 버스는 끊기고 말았다는 연락을 받았다.  


 돌아갈 방법이 있었다. 우리가 왔던 도로 말고, 반대편 길로 이어진 동네로 20분쯤 걸어가면 다른 노선의 버스가 아직 다닌다고 했다. 빠르게 걷는 우리 세 사람 위로 굵은 눈은 펑펑 쏟아졌다. 눈사람이 된 채로 초조하게 탈 것을 기다렸다. 버스의 형체는 보이지 않았지만 엔진 소리가 점점 가깝게 들렸다.    

     

 사골국에 밥을 만 강썬은 호박전과 생채를 먹었다. 초록색 나물을 선호하는 아이는 무나물을 안 먹었다. 무나물에 대한 풍부한 서사를 가진 나는 접시에 붙은 것까지 싹싹 먹었다. 사시사철 먹는데, 왜 추울 때 식탁에 올라온 무나물을 보고는 여러 가지 생각에 잠기는 걸까. 한겨울에는 밖에 나가 놀지 않고 집 안에 있느라 엄마의 동선을 눈여겨 봐서일까.


 내가 자란 시골은 김장 끝나고 나면 텃밭에 구덩이를 파서 짚을 빙 둘러 깔았다. 거기에 무를 차곡차곡 쟁이고는 얼지 않게 다시 짚을 올리고 흙으로 덮었다. 엄마는 끼니마다 구덩이에서 무를 파와 국을 끓이고 나물을 했다. 어린이 허벅지만큼 눈이 쌓이면 빗자루를 들고 가서 쓸어낸 다음에 언 땅을 팠다. 무를 꺼내 들고 온 엄마는 눈사람이 되어 있었다.


 일과를 마친 느긋한 저녁밥 시간. 무나물 한 접시 덕분에 20년 전, 40년 전으로 끌려갔다 온 나는 재미있는 영화나 책을 읽은 것처럼 이야기가 하고 싶었다. 아지랑이 일 듯 간질간질한 내 마음을 알 리 없는 강성옥씨에게 물었다.


“무나물, 채 썰었어?”

 너무나 바보 같은 질문에 그는 허를 찔린 듯했다. 어이없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럼 채 썰지? 토막 내?”


 아무 말도 안 하면 정말로 바보 인증을 하는 것 같아서 채 썬 무를 뜨거운 물에 데쳐서 양념하냐고 질문했다. 강성옥씨는 대답해주지 않고 빈 그릇을 걷어서 식기세척기에 집어넣었다. 그렇게나 무나물이 궁금하면 직접 해보라고, 베란다에 아직 무가 많다고 했다. 여름에 나오는 것보다 더 단단하고 오래 가고 심이 박히지 않은 맛있는 겨울 무가.


 이제는 날씨 춥다고 무를 땅에 묻는 사람이 내 주위에 한 명도 없다. 그래도 겨울에 무나물을 먹을 때는 눈에 파묻힌 채 무를 가져오던 젊은 우리 엄마를, 잘생긴 청년이었던 강성옥씨를 떠올리곤 한다. 음식에는 단맛, 신맛, 짠맛, 쓴맛, 감칠맛만 있는 게 아니었다. 정말로 그리움의 맛이 포함되어 있다는 생각이 든다. 먼 훗날, 무나물에 젓가락을 뻗으며 우리 아이들이 느끼게 될 추억의 맛.          

                        

#남편의레시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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