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케이키: 카후나의 난임일기
주치의 선생님의 우렁찬 목소리를 응원 삼아 시험관 3차로 진입했다.
부모 중 한 명이 풀타임으로 육아를 전담하는 것을 독박 육아라고 하던데, 내 경우 1, 2차 시험관이 모두 ‘독박'이었다. 남편 없이 모든 과정을 혼자 통과했다. 당시 그의 직장은 북경. 코로나 한복판에 중국과 국경이 닫혀 있었던 시절. 도저히 그가 올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남편은 시험관에 필요한 세포를 여러 차례 채취한 뒤 냉동해 놓고 떠났다. 어차피 남편은 따로 진료나 치료를 받을 일도 없으니, 나는 주사도, 병원 진료도, 시술도 모두 남편 없이 해냈다. 가끔 대기실에서 남편과 함께 내원한 사람들을 보면 내심 부럽기도 했지만, 그럴수록 기죽지 않으려고 더 씩씩하게 걸어 다녔다.
3차에는 남편이 서울에 왔다. 시험관 과정을 함께 하겠다며 휴가를 길게 받았다. 그와 집을 나와 남편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남편이 열어주는 병원 문으로 들어가니 흡사 데이트하는 기분까지 들었다. 함께 있으니 속 깊은 곳부터 안정감이 차올랐다. ‘3차는 뭔가 다르지 않을까’, 히죽 웃다가, 다른 한 편으로 ‘또 호들갑을 떨고 있네, 철 들려면 멀었네’ 라며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짧은 순간에 갖은 쇼를 했다.
당시 남편은 직장에서의 스트레스가 상당했고, 시험관 1, 2차 연이은 실패에 큰 타격을 받았는지, 이때 아예 정자가 채취되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조직검사를 하는 것처럼 조직을 칼로 째고 세포를 찾는 방식(일명 TESE: Testicular sperm extraction)을 겪어야 했다. 마약성 진통제까지 맞고 기운이라곤 찾을 수 없는 상태로 나를 보던 눈빛이 생생하다. 지금 나는 고통스럽지만, 그보단 당신에게 미안한 마음이 더 크다는 눈빛.
이식하는 날 병원에 가니, 동그란 배아 두 개가 모니터에서 나를 보고 있었다. 고생 고생해서 찾은 세포로 만든 귀한 배아였다. 드디어 성공률이 높다는 5일 배양 배아(일명 5배)를 이식해 보는구나. 감개무량했다. 집에 와서 3~4일간은 눕눕(안정을 위해 거의 종일 누워있는 것)까지 불사하며 정성을 기울였다. 평소 운동량이 많은 사람인데 종일 누워있으려니 좀이 쑤셔서 몸이 비비 꼬인다는 게 뭔지 제대로 실감했다.
대망의 피검사 하는 날.
임신인가 아닌가. 두근두근.
임신테스트기에 선명한 두 줄이 떴다.
임신이다.
그렇게 임신 11주까지 아무 탈이 없었다. 5주에는 초음파로 아기집도 보고, 6주에는 콩닥콩닥 심장 소리도 들었다. 8주에는 훠이훠이 팔다리를 휘젓는 젤리 곰 같은 귀여운 모습도 만났다.
그러다 11주, 1차 기형아 테스트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