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후나의 난임일기
첫 난자 채취를 하고 5일 후, 병원에서 수정된 배아를 이식할 테니 내원하라고 안내했다. 설마 이번에 임신하는 거 아냐, 김칫국까지 벌컥 마시고 병원에 갔더니 시술이 취소되었단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라 멍하니 서있었는데 간호사님이 잠시 기다려보라고 말했다.
잠시 후 초록색 수술복에 흰색 크록스를 신은 주치의 선생님이 대기실까지 나와 친절하게 상황을 설명해 주셨다. 목소리는 따뜻했는데 내용은 그렇지 않았다. 정리하면 살아남은 배아가 없었다. 1차부터 성공할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지만, 채취부터 이식까지 한 사이클은 완주할 줄 알았다. 제대로 뛰지도 못해보고 경기장에서 강제로 퇴장당하는 선수처럼 억울한 마음으로 시험관 1차를 마감했다.
한 달 쉬고 2차 시도에 돌입했다. (제가 쉬고 싶어서 쉬는 게 아니고, 난소가 쉬어야 한대요. 주치의에 따라 두 달 쉬는 경우도 있어요.) 한 번 해봤다고 주사도, 질 초음파도, 마취도, 시술대에 오르는 것도 모든 과정이 한 결 수월했다. 처음과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이었다. 주사도 한두 번이 무섭지, 2차부터는 거의 도사가 돼버렸다. 과장하자면 토스트 하나 구워 먹는 느낌으로 후딱 끝냈다.
그래도 가끔 집 밖에서 주사를 맞을 때에는 현실의 맨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느낌이었다. 어느 아침 깜깜한 주차장 한편에 차를 세우고 보랭백에서 주사기를 꺼내, 4대의 주사를 순서대로 아랫배에 놨다. 한숨과 함께 다 쓴 주사기를 한참 쳐다보며 생각했다. '앞으로 주사를 몇 나 더 맞아야 하는 걸까.'
시험관 2차에는 이식도 했다. 하지만 임신 반응 검사를 할 필요도 없이 생리가 시작되었다. '시험관까지 하는데 곧 잘되지 않을까' 하는 낙관의 마음이 쨍그랑 깨졌다.
그렇게 1, 2차가 순식간에 끝나 버렸다. 4개월의 시간과 큰 돈의 치료비가 증발했다. 유일하게 남은 것은 패배감이었다.
주치의 선생님과 내가 맞지 않는 걸까, 괜히 애꿏은 곳을 바라보며 일명 손바꿈(같은 병원에 다니되 다른 의사 선생님으로 변경하는 것)을 하기로 했다. 전교 1등만 했을 것 같은 A선생님의 기존 예약을 취소하고, 항상 대기실이 붐비는 B선생님으로 예약을 변경했다.
B선생님 진료를 처음 보는 날.
분명 시간 약속을 하는데도 처음 다닌 난임 병원에서는 대기 시간이 언제나 3시간이었다. 대기실 TV에서 나오는 주사 맞는 법 영상을 다 외우고, 비치된 잡지를 다 읽을 때쯤 내 이름을 불렀다.
A선생님이 차분한 모범생 스타일이라면, B선생님은 씩씩한 교관 스타일이었다. 목소리도 10배는 더 컸다. 3분 가량의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내 차드와 초음파 사진을 집중하는 미간으로 꼼꼼히 보시더니 큰 소리로 말했다.
"일단 한 달 더 쉬고 와요. 난소가 쉴 수 있도록 도와주는 약을 처방해 줄게요. 운동 열심히 하고 다음 달에 봐요."
두 번 연속으로 실패해서 기가 팍 죽어 목소리도 모기 소리처럼 작아져 버렸는데, 자신감 넘치는 선생님의 목소리를 들으니, '이번에 진짜 잘되는 거 아닌가' 근거 없는 긍정이 솟았다.
병원 문을 열고 나오는데, B선생님의 씩씩한 목소리가 계속 따라오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 난임 병원 주치의 선생님들의 업무 환경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참 극한 직업이겠다. 기운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우울한 '환자'들을 하루 종일 봐야 하니까. B선생님에게 내가 칙칙하지 않은 환자가 될 수 있을까, 아니 되고 싶다는 바람을 그리며 처방받은 약을 챙겨 집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