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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증

“정말 괜찮니? 너 자신, 너의 존재는 안녕하니?”

by 소미소리

지난여름에 더위와 습도를 이기지 못하고 피부가 가렵기 시작했다. 환경이 좋지 않으면, 몸의 가장 약한 부분이 먼저 탈이 나는데 내게는 몸의 약한 부분이 피부이다. 지난여름, 아이들의 성화와 나의 욕망이 합쳐져 1주일간 제주도 여행을 했다. 여행이야말로 새로움에서 오는 기쁨이지만 이번 휴가는 새로워도 너무 새로웠다. 태풍이 딱 제주도를 지나는 때여서, 세상에 그런 비는 정말 처음 구경했다. 잠깐만 밖을 이동해도 옷이 온통 젖고, 밤새 끊임없이 비가 내리고, 한라산은 태풍으로 폐쇄되었다. 비가 끝없이 오니, 환기하려고 잠깐 창문을 연 사이에 에어컨 바람을 뚫고, 무지막지한 습기가 실내로 침입해 들어왔다. 하늘의 별도 볼 수 없고 먹구름으로 어두컴컴했다. 한 마디로 이번 여름휴가는 최악이었다. 날씨가 좋았던 며칠간은 신나게 해수욕을 했지만, 바다에 인파가 몰려서 여유로운 해수욕은 불가했으니, 차라리 늘 가던 서해가 낳았을 뻔했다는 심리적 불만감까지 합쳐져서, 피부에 그만 탈이 나고 말았다.


습진이 생긴 피부를 방치했더니 금세 덧나고 말았다. 일부러 방치한 것은 아니고, 예전에 스테로이드 연고의 부작용을 겪었던 기억이 있어서 연고를 쓰지 않고 자연적으로 피부가 낫기를 바랐다. 그렇게 흘려보낸 시간이 어느덧 한 달이 지나갔고, 습진이 생긴 자리가 낫을 만하면 긁고 또 긁는 식으로 피부가 심하게 덧나고 말았다. 피부 한 군데가 상하니, 자꾸 피부 여기저기가 가려운 느낌이 들고 공연히 피부를 긁적이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무심코 긁다가, 피부가 너무 아파서 봤더니 내가 생살을 긁고 있었다. 덧난 피부는 긁으면 시원하니 더욱더 긁게 되고 그러면 더욱 덧나는데, 생살을 긁으니 비로소 통증이 느껴졌다.


상처, 상처는 그렇다. 건강한 피부에 처음 상처가 나면 아파서 바로 반응을 한다. ‘이건 뭐야? 아프잖아.’ 그러니 그만 손을 떼고, 피부가 더 이상 상하지 않도록 관리한다. 그런데 이미 덧나버린 피부라면, 긁어도 아픈 줄 모르고 더 긁어 대니 더욱 덧나고 만다. 아프다고 할 때, 아픈 줄 알 때 내 피부를 보호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피부에는 (장기 사용하면 나타나는 스테로이드 부작용 때문에) 양약이나 병원의 힘을 의심하는 사람이지만, 약국에 찾아갔다. 약한 스테로이드 연고를 처방 받고, 단기간만 써 보기로 마음먹는다.


피부만 그럴까? 마음도, 직장 생활도 똑같은 것이 아닐까? 뜨거운 물에 넣어진 개구리와 찬물에 넣어진 개구리 중에 누가 더 살 확률이 높을까? 뜨거운 물에 넣은 개구리는 얼른 뛰쳐나가지만, 찬물에 넣고 천천히 온도를 올려서 삶으면, 개구리는 따뜻해지는 물에서 가만히 있다가 어느새 완전히 익어 버린다. 개구리가 뜨거워진 물의 온도를 느끼고 그 공간을 벗어나려고 할 때에는 이미 기운이 빠져버린 상태여서 꼼짝없이 삶아지고 만다. 그것이 우리 삶에도 예외는 아니라는 생각에 섬찟하다.


물론 버티고 있어야 할 때도 있다. 힘든 순간이 조금도 없이, 완전히 순조롭게 진행되는 일은 사실 별로 없다. 하지만 정말 본인에게 맞지 않아서 자신의 본연의 모습이 조금씩 상처 입고 상해서 결국 아픈지도 힘든지도 모르는 상태로 수십 년의 세월이 지난다면 그것은 얼마나 억울하고 아쉬운 일인가? 덧나고 덧나서, 벗어날 힘도, 벗어날 마음도 없이, 그저 자신이 속한 곳에서 허송세월이나 하고 있다면 어떨까?



Photo by Valentin Lacoste on Unsplash

아베 코보의 <모래의 여인>에서 주인공 남자는 어쩌다가 모래 구덩이 속 집에 살게 되는데 그곳에서 빠져나가려고 온갖 애를 쓴다. 하지만 여러 번의 시도가 실패로 끝나자 모래 구덩이 집에서 빠져나가기를 포기한다. 나중에는 모래 구덩이 집에서 빠져나갈 수 있도록 사다리도 생기고, 아무도 그를 감시하지 않지만 그는 그새 모래 구덩이 집에 익숙해져서, 결코 모래 구덩이를 빠져나가지 않는다. 그 남자의 삶은 어떻게 되었을까? 모래 구덩이 속의 작은 집이 그 남자의 남은 삶의 전부가 되어 버리지 않았을까?



아픔이 느껴진다면, 상처가 덧나기 전에 아픔에게 묻고, 또 물어보자. “정말 괜찮니? 너 자신, 너의 존재는 안녕하니?”라고….


커버 사진 출처, Photo by Diana Polekhina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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