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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미소리 Dec 11. 2023

덜어내서 풍성한 김밥

먹고 사는 일상

김밥을 싸려면 준비가 대단했었다. 밥을 고슬고슬하게 지어서 참기를 듬뿍 들이붓고 볶은 소금과 참깨를 넉넉하게 뿌려서 비볐다. 김과 햄, 어묵, 맛살, 달걀, 단무지, 시금치, 당근은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으로 여기고 한 가지라고 빠지면 서운하니 모두 준비했다. 이것들을 다 넣고도 가족 기호에 따라 참치와 마요네즈 혹은 치즈를 가득 넣었기에 여러 가지 속재료들을 양껏 넣을 수가 없어서 햄도 한 줄, 달걀도 가늘게 썰어서 한 줄, 시금치도 두 세 가닥 이상을 넣지 못했다. 김밥은 어떻게 싸도 맛이 없을 수 없지만, 쉽게 물리고 특색 없는 김밥이었다. 자주 싸면 김밥은 금세 찬밥이 되어서, 달걀물을 입혀 기름에 구워야 겨우 끝까지 먹을 수 있었다.


며칠 전에 돼지고기 수육을 했다. 양가에서 나누어 주신 김장김치가 맛있어서 김치에 곁들인 수육이라면 꽤 괜찮은 한 끼 식사가 된다. 주말이니 다른 반찬 신경 쓸 것 없이 돼지고기 앞다리를 넉넉히 사다가 삶았다. 보통은 정육점에서 서비스로 주는 월계수 잎만 몇 장 넣어 삶는데, 이번에는 냉동실에 박혀 있던 양배추 심지도 꺼내어 함께 넣았다. 가장 큰 냄비에 물을 가득 붓고 뚜껑을 아주 조금 열어 둔 채로 한 시간 삶으면 수육은 쉽게 완성된다. 한 김 식혀 썰어 두면 반찬 걱정 끝이다. 바로 삶았을 때에는 그냥 먹고, 좀 식으면 냄비에 물을 조금 붓고 찜기에 올려서 증기만 가해 주면 다시 보드라워진다. 그러다가 물릴 때쯤 되면 프라이팬에 기름을 넣지 않고 살짝 구우면 돼지기름에 고기가 노릇하게 구워져서 먹을만하다. 그렇게 가족들이 하루 내내 먹고도 남은 수육은 냉장고에 초라하게 들어간다.



다음날 애매하게 남은 고기로 무엇을 할까 고민하다가, 그 고기가 잊힐뻔한 시간에 작은 아이가 그 고기로 김밥을 싸달라고 한다. 그래서 냉장고 파먹기 김밥 싸기를 했다. 남아 있던 고기는 길게 잘라서 프라이팬이 한 번 굽고, 여열을 이용해서 고추장과 설탕으로만 간을 한다. 그리고 냉장고 속에 들어 있던 채소 총출동이다. 상추와 깻잎은 씻어 두고, 오이와 당근은 채 썬다. 채 썬 오이 절반은 생으로 두고 절반은 굶은 소금 톡톡 뿌려서 절여 둔다(30분 이상 방치해 두었다가 물기를 꼭 짜서 사용하면 단무지 대용으로 좋다). 채 썬 당근도 절반은 생으로 두고, 절반은 프라이팬에 기름을 살짝 둘러 소금을 뿌린 다음 숨이 죽을 만큼만 볶는다. 달걀지단도 한 장 부친다. 김밥 10줄을 싸기 위해서 밥은 5인분을 한다(1인분 밥으로 김밥 2줄은 나온다). 참기름은 향기를 풍길 만큼만 소량 넣고 소금은 간이 맞도록 넣는다. 밥을 잘 섞으면 김밥 준비는 끝이다.


작은 아이와 식탁에 나란히 앉아서 김밥을 싸기 시작했다. 김 위에 밥을 올리고 손가락으로 넓게 편 다음, 밥 위에 깻잎과 상추를 올리고, 다시 그 위에 원하는 김밥 속재료를 넣는다. 깻잎으로 속재료를 오므린 다음 김밥을 말면 보기에 깔끔하고 속재료의 수분이 밥까지 퍼지지 않는 김밥이 완성된다. 몇 줄은 깻잎과 상추에 생오이와 생당근만 넣어서 싸고, 나머지는 고기와 달걀을 넣었다. 어떤 김밥에는 볶은 당근과 김치도 추가했다. 의외로 생채소만 들어간 김밥이 담백하고 맛있었다. 디톡스를 시작하기 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김밥인데, 소금기라고는 절인 오이 한 가지뿐인 채소김밥이 상상 이상의 맛이다. 고추장 양념 돼지고기를 넣은 김밥은 가족들이 아주 잘 먹는다. 햄과 어묵, 맛살에 단무지까지 넣어서 만든 김밥보다 훨씬 인기가 좋다.


더하는 것보다 빼는 것이 좋을 때가 있다. 디톡스를 하면서 고기와 가공 식품을 멀리하고, 채소를 가까이하고 있다. 식재료의 가짓수를 줄이면서 간도 점점 약하게 하고 있다. 일부러 그러는 것이 아니고 채소 본연의 맛을 알아가면서부터는 간을 세게 하지 않은 식재료의 맛이 좋게 느껴진다. 김밥을 쌀 때에는 기름도 듬뿍, 깨와 소금도 팍팍 뿌려서 밥을 준비하던 사람이었는데, 이제는 참기름을 조금 넣었을 때 오히려 향미가 더 좋다. 굳이 가공육과 단무지를 넣지 않아도 맛깔스러운 김밥이 완성된다. 식탁에 고기반찬과 가공육, 맛이 강한 소스가 있어야 맛있는 식사가 가능한 사람이었고, 감자볶음을 해도 버터를 한 큰 술은 넣어야 제맛이라고 느꼈었는데, 한 스푼을 덜어 내고 나서 오히려 맛있는 것들이 더 많아졌다. 아삭한 오이의 향긋함과, 채 썬 당근의 깊은 단맛, 상추의 쌉싸름한 맛은 한 스푼의 재료를 덜어 내니 드디어 올라온다.



이번에 김밥을 싸면서 새로 구입한 것은 김밥김과 오이, 깻잎뿐인데 오히려 풍성하고 다양한 김밥이 되었다. 덜어 내야 풍성해지는 것은 아이러니지만, 그 아이러니가 진실이라는 것을 채소 김밥을 먹으며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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