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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옥 Feb 28. 2018

생명을 키운다는 것

그대는 무엇을 좋아하나요? 무엇이 필요한가요?

어린이집에 등원하게 된 나의 아이들은 어린이집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부터 울어댄다. 물론 그 전에 얌전한 것은 아니다. 현관 문을 나서기 까지 한참을 실랑이를 해야 한다. 그나마 이것도 나아진 것이기는 하다. 3주 전쯤 됬으려나, 처음 보내던 때는 2시간을 집에서 아이와 씨름을 해야 했으니까. 힘으로 제압하면 아이가 언젠가는 포기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아이를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작은 목소리로 응수하면서 아이 입에서 스스로

“어린이집에 가겠다”

 라는 말을 하기 까지 장장 2시간이 걸린 것이었다. 그 날 이후로 점점 그 시간이 짧아 지긴 했는데, 보낸지 며칠 지나지 않아 1주일이 조금 넘는 어린이집 방학을 맞아, 외갓집에서 할아버지 할머니와 한참을 보내고 온 우리 아이들은 방학이 끝나고 새로 등원하는 요즘 다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사투 중이다.


오늘 아침에도 한바탕 전쟁을 치르고, 아이들의 우는 얼굴을 마주보내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면서, 나는 인간의 성장에 관한 몇 가지를 생각 했다.


다 큰 성인이 되어 한 개인이 다른 개인과 만나 삶을 같이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이 없이는 무난히 지속하기가 지극히 힘이드는 일이니까. 그러하기에 우리는 그렇게 누군가와 동거하는 생활을 통해, 타인의 입장에 서보기도 하고, 타인의 감정과 태도에 유의하면서, 오히려 이런한 과정을 지나며 자신이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갖는다. 물론 이 동거하는 관계가 가족으로 묶인다고 해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그리고 성인과 성인이 만나 서로 배려하는 과정을 통해 함께 지내면서 아이를 낳게 되면 그 아이들을 키우면서, 성인들간의 관계에서는 얻기 힘든  몇 가지의 인간에 관한 중요한 개념들을 스스로 생각해보게 되는 경험들을 간혹 하게 된다. 아이들은 인간이 어떤 과정을 통해서 성장하는지를 늘 내 눈앞에서 생방송으로 보여주고 있으므로, 나는 그들을 통해 인간이 성숙해간다는 것이 어떠한 의미를 갖는 것인지, 성숙한 인간이란 어떠한 모습을 갖춰야 하는 것인지에 대해서 깨닫는 순간들이 있다.


오늘 아침에도 그랬다.


아직 정신과 육체가 온전하지 않은 생명을 스스로 홀로 설 수 있을 때까지 키운 다는 것. 그 지난하고도 고된 여정 중에서 찾을 수 있는 기쁨이란 바로 그러한 과정을 통해서 자신이 성장할 수 있는 여지를 찾는 순간 또한 발견할 수 있는 것이지  않을까 싶다. (물론 아이가 웃는 것만 봐도, 자는 것만 봐도 충분히 기쁘지만)


'나'를 중심으로 생각하는 삶


아이는 아까도 울면서 내게 손을 흔들었다.

“빈이 잘 있을 수 있지? 엄마는 우리 빈이를 제일 많이 사랑해. 그러니까 어린이집에서 친구들이랑 재밌게 놀고, 선생님 말씀도 잘 듣고 맘마도 잘 먹고 와. 알았지? 우리 빈이는 이제 많이 컸으니까 그렇게 하면 훨씬 더 좋을 거야.”

 라고 내가 말하면 아이는 여전히 소리를 내면서 울고 있지만 그래도 내게 손을 흔들었다.

“응”

이라고 울먹이면서.


나는 아이와 헤어지고 나오면서 우리 아이가 드디어  

“해야 하는 일 중에는 하기 싫은 것도 있지만 그것을 수용해야 한다”

는 것을 배우는 중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아이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아마도 하고 싶은 것만 하면서 살았을 것이다. 먹고 싶어서 먹었고, 자고 싶어서 잤고 엄마가 필요해서 울었고 놀고 싶어서 놀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살았던 아이가 드디어 ‘하기 싫은 일을 해야 한다.’는 명제를 학습하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그것은 내가 아이에게 가르친다기 보다 아이가 스스로 깨닫는 것이겠지.


성인이 되기 전까지의 삶이란 이처럼 자기 중심으로 살아도 별 문제가 없을 것이다. 바로 내가 해야하는 일을 ‘나’를 중심으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이다. 내가 해야하는 일 중에도 내가 좋아하는 일이 있고, 내가 싫어하는 일이 있다는 정도. 그리고 내가 그리 내키지 않은 일도 간혹 해야 하는 경우가 있고, 그렇게 하다보면 사실은 그것이 정말 내게 재미진 일이었다는 것을 깨달아 가면서 사실 모든 것은 다 접해봐야 안다는 정도. 그러니 미리 성급하게 생각해서 ‘이것은 하기 싫어’ 라고 생각할 필요 없다는 것 정도.


타인을 중심으로 생각하는 삶


하지만 나는 성인의 삶이란 이것에서 한발짝은 더 나아가야 하는 것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왜냐하면 성인이 된 사람은 자신의 삶을 스스로 부양할 수 있어야 하고, 더불어 자신의 가족들을 부양할 수 있어야 하므로, 이를 성공적으로 해내기 위해서, 성인이 된 자의 삶이란 어릴 때처럼 세상의 모든 일을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놓고 생각해서는 안되며 오히려 타인을 중심에 놓고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이, 되려 자신과 자신의 가족을 일으켜 주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내가 해야 하는 일을 판단하고 선택할때, ‘나’를 중심으로 생각해서 내가 좋아하는 일, 내가 싫어하는 일로 나누는 것이 아니라, ‘타인’을 중심으로 생각해서 타인이 좋아할 만한 일, 타인이 싫어할 만한 일로 나누어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싶은 것이다.


좀 더 쉽고 편하게 이야기 하자면, 나는 이제 돈을 벌어야 하니까. 돈을 어떻게 벌까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이다. 내가 돈을 번다는 것은 무엇을 매개로 하든지 간에 타인이 자발적으로 내 주머니에 돈을 넣어 주어야 하는 것이고, 그렇다면 나는 타인에게 그들이 좋아할만한 어떤 매력적인 무언가를 제공해야 하는 것이다. ‘자발적’이 아니라면 그것은 강도와 깡패일 것이니, 타인이 자발적으로 내게 돈을 주어야 하는 데, 이것이 성립이 되려면, 성인이 되어 자기 자신과 가족들을 부양해야 하는 사람의 생각이란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을 중심으로 돌아가야 하지 않을까 싶은 것이다.


즉 성인이 되어 누군가와 함께 살면서 자연스럽게 학습했던 ‘배려’라는 행위를 삶 전반에 옮겨 놓는 일들을 하는 것이다. 내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따뜻하고 충실하게 배려하면서 살아가느냐에 따라서 역설적으로 내가 어느 정도의 삶을 살 수 있느냐가 결정되는 것이다. 이 사람은 무엇을 좋아할까? 이 사람은 무엇을 싫어할까? 늘 이것을 고민하고 실행하는 것이다.   이런 입장의 사람들은 무엇을 좋아할까? 이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이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은 무엇일까 하고 생각하는 것. 나는 누구에게 얼마만큼의 것을 해줄 수 있는 가. 나는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는 사람인가.


언젠가 나의 아이들도 자라서 자신을 부양해야 하는 때가 오고, 또한 지금의 내가 그러한 것처럼, 아직은 세상이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자신의 어린 아이들을 먹여살려야 하는 때가 오겠지. 그리고 아마도 시간이 더 지나면 더이상 일을 할 수 없는 때가 올지도 모르고. 그리고 그렇게 늙어지는 때는 먼 훗날의 나에게도 반드시 올 것이다.  하지만 충분히 늙었다고 해도 내가 성인이라는 것은 변하지 않을테고, 그렇다면 그때에도 나는 누군가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일텐데, 나는 다 늙어진 노인이 되어서 어떤이에게 내 무엇을 줄 수 있을까. 그리고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이 더이상 일을 하지 못하는, 더이상 부양의 힘이 없이 늙어질때 나는 그들에게 무엇을 얼마만큼을 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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