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통통한 체형이어서 처음에는 배가 나온줄 몰랐다. 그저 살이 좀 쪘겠거니 생각했다. 투석을 시작할 때는 임신 6,7개월 정도로 보였다. 이때가 10년도 더 전인데 사실 나는 엄마 배가 꽤 나왔다고 생각했었다. 최근에 이 시절 사진을 본 적이 있다. 엄마는 청바지에 몸에 꼭맞는 자켓을 입고 있었는데 하나도 배가 나와보이지 않았다. 남편이 사진을 보고 놀랐다. 나도 놀랐다. 그때는 배가 많이 나왔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불과 10년 전에 엄마가 이랬구나.
물혹은 무럭무럭 자랐다. 투석을 시작한 이후로도 계속, 쉬지 않고 자랐다. 신장에서만 물혹이 커지는 게 아니라 간에서도 물혹이 커졌다. 물혹이 너무 커서 힘들 때는 물혹을 빼는 시술도 몇 번 했다. 시술을 하고나면 일시적으로 좀 편해졌지만 금세 옆자리 물혹들이 자리를 차지하거나 새 물혹들이 생겨서 장기적으로 봤을 때 신장 크기를 줄이는데 영향을 준 것 같지는 않다.
간이 하루가 다르게 커지는 것도 문제였다. 간은 물혹을 빼는 시술도 없었다. 계속 커지기만 했다. 의사 말로는 엄마 배가 부풀어 오르는 데 간도 한 몫 한다고 했다. 의사는 간 절제를 할 수는 있다 했지만 권하지는 않았고 엄마는 어쩌지, 어쩌지 하는 상태로 시간만 보냈다.
가장 이상적인 상황은 엄마와 딱 맞는 뇌사자 장기가 나와서 간과 신장을 한번에 이식받는 거였는데 현실적으로 매우,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간과 신장을 두 개 다 한꺼번에 받는 것도 어렵고, 이식 가능한 장기가 나오면 면역학적으로 부작용이 일어나지 않을 가장 적합한 사람에게 이식을 해주는데 엄마는 애를 셋이나 낳아서 몸에 면역항체가 많아서 어렵기도 했다.
나는 뇌사자 장기 이식을 받는 일은 매우 어려울 거라고, 아마도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인지하고 있었는데(나는 건강에 있어서만큼은 현실적이다 못해 비관적인 사람이다) 엄마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잘 모르겠다. 엄마는 아마도 계속 기다렸을 것이다. 그래서 간 절제도 하지 않고 비정상적으로 부푼 배를 끌어안고 버티며 살았던 것 같다.
내가 말했어야 했을까? “엄마, 아마 엄마 몸에 맞는 뇌사자 장기는 없을 거야. 희망이 없어”
배가 부풀면 갈비뼈가 벌어진다. 아마 만성적으로 옆구리 통증이 있었을 거다. 바로 누우면 장기들이 폐, 심장을 밀어올려서 숨이 차서 잘 때도 바로 누워서 잠들지 못한다. 엄마는 등 뒤에 쿠션, 베개를 대고 잠이 들었다.
이것 뿐일까. 간과 신장이 온갖 장기들을 다 눌렀는데 소화는 제대로 됐을까? 허리는 아프지 않았을까? 변비는 안 생겼을까? 다리는 저리지 않았을까? 안 아픈 데가 있었을까?
그런데 엄마는 자잘하게 아픈 건 말하지도 않았다. 말했다 한들 내가 들을 준비가 되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듣지 않았을 거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겠지.
나와 둘째가 타지 생활을 할 동안 엄마와 둘이서만 지낸 막내는 ‘엄마는 아픈 것에 대해 얘기하는 걸 싫어했다’고 말했다. 엄마에겐 ‘아픔=약함’이었을 것이다. 엄마는 약함을 표현하는 걸 유독 싫어했다. 야생의 삶을 사는 동물처럼 약하면 잡아먹힌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엄마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내게 얘기해준 적이 별로 없다. 내가 아는 건 엄마는 학교를 다니지 않았다는 것, 집에서 계모가 낳은 동생을 돌봤다는 것, 10대가 되자 집을 나와 친척집에서 지내며 일을 했다는 것 정도. 진짜 엄마는 약하면 잡아먹히는 세상에서 자랐을지도.
그래서 약함을 드러내도 되는, 약함을 드러내라고 존재하는 가정 안에서도 결코 그러지 않았다.
엄마는 삶의 고통을 차곡차곡 뱃속에 넣고 또 넣으며 배를 점점 키웠다. ‘빵’하고 터지기 일보 직전까지. 나는 그저 볼 뿐이었다. 같은 병을 가진 딸로서 눈앞에 보이는 내 미래를 암울하게 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