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이 다가올 때

#초단편소설

by 옥상희

아파트 난간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아래를 내려다봤다. 퇴근하고 집에 들어가는 길에 항상 하는 행동이다. 17층 난간 아래로 보도블록이 촘촘히 깔린 길이 보였다. 안쪽으로는 화단이지만, 여기서 떨어진다면 보도블록에 떨어질 게 확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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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도면 확실히 죽겠는데.’


하지만 100%란 없다. 잘 알고 있다. 혹시라도 화단에 떨어진다면 죽지 못할 수도 있다.


“얌마, 절대 투신자살은 안 돼. 떨어져서 죽는 거 쉬운 거 아니야. 너희들이 생각하기에는 땅바닥에 부딪치는 순간 즉사할 거 같지? 어느 얼빠진 놈들은 바닥에 부딪치기 전에 정신 나간다는 헛소리하는 놈들도 있더만. 안 떨어져 봐서 하는 소리지. 떨어져서 바로 잘 안 죽어. 대가리 깨져서 피 나고, 머리 부어올라서, 고통스럽다고, 살려달라고 구급차 안에서 우는 자식들이 얼마나 많은 줄 알아?”


얼굴이 벌게진 소방관 친구가 술자리에서 침을 튀기면서 말했다. 풀린 눈을 하고, 소주잔을 끊임없이 입에 털어 부으면서. 술 때문에 열이 올라서인지 붉고 촉촉한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 이상 아무 말도 더하지 않았지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눈만 봐도 알아들을 수 있었다. 친구의 눈을 피해 소주를 들이켜며, ‘그러면 떨어져서 죽는 건 안 되겠군.’하고 마음을 접었지만, 집에 들어갈 때마다 17층 높이, 보도블록의 딱딱함은 나를 유혹했다.


병이 더 깊어지고 있는지, 부서진 파편 같은 단어들이 떠올랐다. ‘떨어진다’, ‘푹’, ‘운다’ 같은 단어들이 걸을 때, 앉았다가 일어설 때, 화장실 문을 들어설 때 아무 이유 없이 머릿속에 박혔다.


‘삶이 이어지지 않고 끝이 났으면 좋겠다. 눈을 뜨지 못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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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도 먹을 만큼 먹고 이런 어린아이 같은 생각을 하는 게 한심했다. 한심해서 더 죽었으면 하고 바랐다.


‘삶이 가치가 있으려면 적어도 지금처럼 살지는 말아야 할 텐데. 삶이 깨지고, 조각나고, 바스러지고. 잠깐, 바스러지는 게 삶? 나?’


나에게 중요한 게 무엇인지 깊이 생각을 해봤던 것 같은데. 그래서 내가 살아있는 듯한데. 기억나지 않았다. 내게 중요한 게 없나? 나는 나를 중요시할 게 없는 초인적인 인간으로 여기는 걸까? 중요시할 게 없는 하찮은 인간으로 여기는 걸까?

그래도 어떤 날은 괜찮을 때도 있다. 중간중간, 삶이 멈췄으면, 이대로 소멸해버렸으면 하고 바라기는 하지만, 그래도 죽을 정도는 아닌 날도 있다.


오늘은 아니었다. 오늘은 내가 죽었으면, 삶이 끝났으면 지구가 사라져버렸으면 하는 날이었다. 이미 시작한 아침에게 반항이라도 하듯 물에 젖은 티슈처럼 침대에 붙어 있다가 느지막이 출근하고, 퇴근하는 동안 집안 어디에다가 목을 매야 좋을지 고민한 날이었다.


‘내가 난간 안쪽에서 안전하게 있기 때문에 죽고 싶은 거 아닐까? 난간 위쪽에 위험하게 서 있으면 나도 살고 싶지 않을까? 떨어지기 싫어서 조심하려고 노력하지 않을까?’


시험하고 싶었다. 높은 책상에 걸터앉듯이 벽에 등을 대고 난간에는 손을 얹어 엉덩이를 난간 위에 얹었다. 굳이 떨어지려던 건 아니었는데 마침 무게중심을 잘못 잡아서 몸이 뒤로 쏠렸다. 허공을 가르는 등을 느끼면서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가슴 한켠에 ‘드디어’라는 마음도 없지 않았다. 천천히 한 바퀴를 돌아 바닥 쪽으로 발바닥이 향했을 때, 몸이 멈췄다.


허공 중에 몸이 떠 있었다. 너무 당황해서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다리는 아래로, 머리는 위로, 자연스럽게 서 있었다. 눈을 몇 번 껌벅거리다가 아파트 단지를 내려다봤다. 파리하게 하얀 가로등 불빛 주위로 벌레 떼들이 날아다니는 게 보였다. 시간이 멈춘 건 아니었다. 바람이 불었다. 손가락 사이로, 뺨 옆으로 서늘한 바람이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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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높은 데서 뛰어내려 본 적이 있던가. 기억나지 않았다. 그러면 38년 동안 나는 하늘을 날 수 있다는 것도 모른 채 살았구나. 코뿌리가 찡해지면서 눈물이 나왔다. 이젠 정말 끝이구나 싶었는데.


“아이씨, 나는 되는 일이 없어.”


얼굴을 감싸고 고개를 다리 사이에 파묻고 허공에서 쪼그려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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