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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옥상평상 Sep 30. 2024

삿포로 맥주 박물관

홋카이도 개척과 함께 한 삿포로 맥주의 역사



삿포로에 오면 한 번쯤 찾는다는  삿포로 맥주 박물관을 찾았다. 원래는 시내 중심가인 오도리 공원 쪽에서 버스를 타고 가면 금방이었지만 지하철 1일 권을 구입한 나였기에  지하철을 이용해 가기로 했다. 지하철 역에 내려 20분 정도를 걸어야 하는 거리였다.

삿포로의 중심거리인 오도리 공원의 동북쪽에 위치한 삿포로 맥주박물관은 원래 설탕공장으로 사용한 붉은 벽돌 건물이었다. 이러한 양식은 18세기 무렵 영국이 세계 곳곳에 자국의 건물을 지으면서 사용한 양식인데 개인적으로는 말레이시아의 말라카에서도 이것과 같은 스타일의 건물들을 제법 보았던 기억이 있다.




사실 나는 삿포로 맥주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홋카이도 지역 외에서 팔리는 삿포로 맥주를 좋아하지 않는다. 통칭 삿포로 '쿠로라베'라고 하는 것인데 이는 쿠로라베란 검정 라벨이라는 뜻이다. 이 쿠로라베 삿포로 맥주는 처음 발매 후 일본 전역에서 엄청난 인기를 얻어 오늘날의 삿포로 맥주를 있게 한 장본인이다. 하지만 나는 삿포로 맥주 특유의 쓴 맛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나는 오히려  맥주의 고소한 맛을 좋아하는 편인데 삿포로 맥주이지만 홋카이도 내에서만 판매하는 삿포로 '클래식 맥주'를 그러한 이유로 좋아한다.

삿포로 클래식 맥주는 맥주 보리의 싹을 틔어 만든 맥아를 100퍼센트 사용한 것으로 유명하다. 맥주의 원료인 맥아는 홉과 더불어 맥주의 생명과도 같은 재료인데 일반적으로는 맥아를 많이 사용한 맥주일수록 좋은 맥주로 칭한다. 그런 이유로 맥아를 일정 기준 이하로 적게 사용한 맥주는 맥주라고 부르지 못하고 발포주라고 부르게 된다.

초창기의 맥주 제조 시설



일본의 불경기가 길어지면서 일본 사람들은 맥주조차 가볍게 사 먹지 못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일본의 발포주 시장이 급격하게 커지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그것과 비슷한 코끼리 그림이 그려진 필라이트라는 상품이 있다. 이 제품은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에서 반지하 방에 사는 송강호 가족이 즐겨 먹는 장면으로 유명세를 탔다.


삿포로 맥주의 역사는 홋카이도 개척과 깊은 관련이 있다, 그 설립자인 나카가와 세이베이(中川清兵衛)는 어릴 적부터 서양문물을 동경했다  그러던 중 마침내 16세 무렵 당시 법으로 엄격히 금지된 영국으로 죽음을 각오하고 도항을 시도했다. 그곳에서 그는 갖은 고생을 하다가 우연하게 일본에서 파견된 외무상을 만나게 되었고 그의 용기와 재능을 인정한 외무상은 그를 독일로 보내 맥주 기술을 배우게 하였다.

당시 독일은 라거 맥주 제조 기술로 세계적으로 유명했으며, 라거 맥주는 저온에서 발효되기 때문에 맑고 깨끗한 맛이 특징인 맥주였다. 나카가와는 독일 현지의 양조장에서 직접 라거 맥주 제조법을 배웠으며, 이는 그가 일본으로 돌아와 정부의 지원을 받아 본격적인 맥주 양조장을 설립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독일에서는 맥주의 발효 과정, 보관법, 원재료의 배합 및 양조 기계의 사용법까지 체계적으로 배울 수 있었으며, 이러한 경험은 그가 이후 삿포로 맥주를 설립하는 데 있어 중요한 기술적 토대가 되었다.

나카가와에 대한 설명



나카가와는 독일에서의 양조 경험을 통해 일본에서 대량 생산이 가능한 맥주 양조 방식을 도입할 수 있었다. 특히 독일의 저온 발효법은 홋카이도의 기후와 맞아떨어졌고, 이를 통해 일본 최초의 본격적인 맥주인 삿포로 맥주가 탄생하게 되었다. 이 과정은 일본이 서양의 과학 기술을 적극적으로 도입하고, 자국의 산업화와 경제적 성장을 꾀하던 메이지 시대의 목표와도 선명하게 맥이 닿아있는 것이었다. 한낱 술에 불과한 맥주의 제조에도 갖은 정성을 기울였던 그들의 열정적인 태도가 오늘날의 제조강국 일본을 있게 한 것이 아닌가 싶었다.

그에 비하면 당시 우리나라 조선은 쇄국정책으로 굳게 나라의 문을 닫은 채 중국만을 바라보며 안전을 도모하고 있었으니 참으로 운명을 가르는 같은 시기를 대조적으로 보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흔히들 경제는 정치와 무관한 것처럼 이야기하는데 오늘날 세계적인 브랜드가 된 이 삿포로 맥주의 사례만을 봐도 정치와 경제를 분리해서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알 수 있다.

1876년, 삿포로에 맥주 공장이 설립된 것은 독일에서 맥주 기술을 배워 온 나카가의 헌신적인 노력이 결실을 맺은 사건이었다. 원래 도쿄에 세울 계획이었던 것을 그와 한 공무원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당시 지역 개발이 절실했던 삿포로에 세워지게 되었다.

삿포로 맥주 공장은 홋카이도의 지리적 특성과 자연 자원을 활용한 산업화의 상징으로, 특히 제주도와 같은 맑은 물과 높은 위도로 인한 시원한 기후는 고품질 맥주 생산에 이상적인 조건을 제공하였다. 나카가와는 이러한 지역적 특성을 최대한 활용하여, 서양식 맥주를 대량 생산할 수 있는 체계를 구축하였다.

열정적인 개인과 정부의 노력으로 맺은 이 놀라운 결과는 그 후 홋카이도 전체의 농업과 경제 활성화에 지대한 공헌을 한다. 그 후 삿포로 맥주는 일본 도쿄의 기린이나 에비스 맥주회사 등과 합병해 하나의 회사가 되어 전시 물품을 보급하기도 했지만 2차 세계대전에서의 패배 후 다시 삿포로 맥주라는 별개의 회사로 분리되어 오늘날에 이른다.

세계 여러 곳으로 판매되는 삿포로 맥주


홋카이도는 원래 원주민인 아이누족이 살던 곳이었다 이들은 아메리카 원주민처럼 자신들의 문화와 언어를 지키며  살고 있었는데 일본이 근대화 정책을 펼치기 시작한 메이지 유신 이후 설치한 개척청에 의하여 자신들의 삶의 터전에서 쫓겨나게 된다.

홋카이도의 도시계획은 미국의 도시를 모델로 하여 구상되었는데 그래서일까? 그들이 원주민인 아이누족을 몰아내는 방식 역시 미국이 아메리카 원주민을 몰아낸 것과 몹시도 닮아 있었다. 현재 대부분의 원주민이 사라지거나 이주민과 혼재된 것 역시 동일한 모습이다.

우리는 삿포로를 방문하면서 양고기 요리인 칭기즈칸을 즐기며 바둑판 모양으로 잘 정비된 도시의 구획에 감탄을 한다. 하지만, 한 번쯤 이 도시의 한 곳에 숨어있는 이들이 이 황무지 같은 도시를 개발하기 위해 들인 노력과 열정, 그리고 원주민인 아이누 족의 억울한 희생을 생각해 보는 것도 좋을 듯싶다.

오는 길에는 허름한 라면집에 들렀다. 고작 라면 한 그릇을 파는 데도 정성을 다하는 여주인의 접객을 보고 있노라니 삿포로 맥주가 탄생한 힘이 여기에도 흐르고 있구나란 생각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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