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 봤던 아주 유명한 TV만화가 있다. 나이 어린 주인공 철이가 엄마의 복수를 위해 우주로 떠나는 여정을 그린 작품이었다. 수위가 제법 높은 만화였던 까닭에 만화에서는 철이를 이끄는 여주인공인 메텔을 비롯해 많은 여성 캐릭터들이 특별한 이유 없이 옷을 벗곤 했다. 당시 호기심 많은 국민학생이었던 나는 그 장면들을 보기 위해 일요일 아침부터 득달같이 일어나 흑백 티브이 앞으로 달려가곤 했다. 그때는 아직 토요일조차도 학교를 나가던 시절인지라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을 텐데 지금 생각해 보면 나는 어린 나이에도 성적 호기심이 꽤나 넘쳤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일요일을 보내고 월요일 아침에 만난 꽤 많은 같은 반 친구들이 전날 봤던 은하철도 999 이야기를 주거니 받거니 했으니 말이다. 모두들 서로에게는 주인공 철이의 서부영화에 나오는 총잡이 같은 전투 장면을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실은 모두 같은 마음이 아니었을까 싶다. 바로 메텔의 벗은 모습과 벗은 이유에 관한 이야기 말이다.
은하철도 999가 방영되기 전 군부정권에 의해 내가 좋아하던 방송국인 TBC가 KBS로 통폐합되고 말았다. 지금의 KBS2방송은 TBC방송국이 통합되며 탄생한 방송국이다. 군부정권은 얼마 지나지 않아 기상천외하고도 획기적인 정책을 실행하였는데 이른바 로봇 만화 방송금지 정책이었다.
정책은 발표되기가 무섭게 바로 실행이 되었는데 당시 일요일 아침 한창 인기를 끌었던 로봇 만화 그랜다이저가 어느 날 갑자기 방송이 중단되고 만 것이었다. 그것은 어린 내게 무척이나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너무 오랜 시간이 흘러 정확한 이유는 기억나지 않지만 대략의 이유는 어린이들이 로봇 만화를 즐겨보게 되면 폭력에 길들여지게 된다는 것이었다.
참으로 기가 막힌 이유였다. 배경에 어떠한 내막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얼마 전 흥행한 영화 '서울의 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최고로 폭력적인 방법으로 정권을 찬탈한 정권이 어린이들의 폭력을 조장한다며 한낱 TV 만화영화를 금지하다니 정말 아이러니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더군다나 그 방법에 있어서도 예고도 없는 갑작스러운 방영 중단은 소위 그들이 의도하는 폭력 방지와는 반대로 너무도 폭력적인 방식이었다.
하긴 고려왕조로부터쿠데타로 정권을 찬탈한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고 실시한 정책이 그와 같은 출신인 무신을 억압하고 문신을 우대한 정책인 것을 보면 범죄자가 제일 두려워하는 것은 그들이 썼던 방법과 같은 방법으로 당하는 일인 것 같다. 전두환 역시 자신이 썼던 폭력적인 방법에 의해 보복을 당하는 것을 가장 두려워했으리라...
아무튼 조금은 야한 만화이면서도 주인공들의 기차 여행을 그린 로드 무비인 은하철도 999를 보면서 나는 자연스레 긴 시간의 기차여행을 꿈꾸게 되었다. 그리고 나이가 들면서 그 꿈은 대략 3가지로 압축이 되게 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이러했다.
첫째, 유레일패스를 이용한 유럽 대륙 여행
둘째, 제팬 레일패스를 이용한 일본 일주 여행
셋째, 러시아 횡단 열차를 이용한 유라시아 횡단 여행
일단, 첫 번째인 유럽 여행은 거의 10년 전 11살, 9살 두 아들을 데리고 두 달 반 정도의 일정으로 다녀온 상황이었다. 이에 대한 기록으로 이미 일곱 권의 브런치북도 발행했다. 원래는 아이들이 어려 여행에 대한 기억을 못 할까 봐 싶어 아이들을 위해 작성한 글들이었는데 여행을 다녀와서 틈틈이 정리를 하다 보니 브런치 북으로까지 완성이 되었다.
아직까지는 아이들이 학업에 쫓기느라 내가 적은 글을 다 읽지는 않은 것 같지만, 아이들이 나이가 들어 여유가 생기면 가끔씩 브런치 북을 들추며 자신들의 추억을 더듬어 보았으면 좋겠다. 욕심일지는 모르겠지만, 아이들에게 자녀가 생긴다면 그네들이 이 글을 읽으며 자신들의 아빠와 추억을 공유하는 그림도 꿈꿔 본다.
이제 두 번째 계획을 실행에 옮길 차례였다. 하지만, 내가 일본 기차 여행을 본격적으로 계획하자마자 재팬 레일 패스의 가격이 거의 50퍼센트가 올랐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어떻게 얻은 귀한 시간인데 가격이 올랐다고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었다. 대신 오른 요금만큼의 경비는 숙박비에서 차감하기로 했다. 여행 기간 동안의 며칠은 가격이 저렴한 호스텔의 도미토리 룸이나 캡슐호텔에서 자기로 했다. 거의 50만 원 정도가 올랐기 때문에 한정된 예산에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다.
하지만 문제가 발생했다. 나름 공들여 짠 여행 계획이었는데 긴 시간 동안의 전국일주를 계획하다 보니 날짜가 초과된 것이었다. 레일패스의 총기간은 21일인데 여행 계획은 23일로 짠 것이었다. 하는 수 없이 출발지인 홋카이도의 일정을 포기하고 레일패스의 개시일을 늦추기로 했다.
아이들과 유럽을 다닐 때는 아이들의 안전 때문에 긴장을 해서인지 실수가 거의 없었는데 혼자 다니다 보니 긴장이 풀려버린 모양이었다. 어쩌면 오십이 훌쩍 넘은 나이 탓일지도 몰랐다. 삿포로에 도착한 첫날 2만 보도 안 걸었는데 벌써부터 왼쪽 무릎이 욱신거리고 고질병인 허리도 아파오는 게 앞으로의 일정이 불안해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