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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는 날 아침 단상

으아리꽃

by opera



봄비가 내린다. 솔솔 내린다. 내가 바라던 약비다. 멀리 앞산은 운무로 가리어져 있다. 구름 속에 갇힌 산에서는 무슨 일 이 벌어지고 있을까. 나는 어디에 갇혀 사는 것일까. 감사하게도 요즘엔 우리 집 작은 마당에 갇혀 사는 것 같다. 사람이기에 혼자 살아갈 수는 없다.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라고,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기 훨씬 이전부터, 중국 문자에서는 사람 인(人) 자는 하나로 표시되지 않고 한 일(一)이 양옆으로 두 개 합쳐진 것으로 묘사가 되었다. 두 개가 합쳐져야 사람 인(人) 자 하나가 되는 것이다.


성경에서도 하와는 아담을 만든 후, 아담의 갈비뼈를 취해서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유럽 쪽의 좀 더 리얼리스틱한 얘기다. 어쨌든 사람은, 로빈슨 크루소 얘기가 영화화될 수 있을 정도로 혼자서 살아간다는 것이 힘든 일(一)인이다. 인간이 보고 듣고 말하고 느끼고 만질 수 있는 것은, 그렇게 되도록 만들어진 것은, 대상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혼자 살아가도록 만들어졌다면 굳이 그러한 쪽에 에너지를 쓸 필요가 있었을까.


아무튼 우리는 혼자 살아가지 못한다. 가족이 있고 이웃이 있고 사회 지인들이 있고 소속된 곳의 동료들이 있다. 오늘 아침엔 그런 여러 이웃들도 중요하지만 마음속의 조금 더 가까운 이웃, 마당을 둘러본다. 마당의 초목들은 각각의 다른 모습으로 다가와서 각각의 모습에 어울리는 삶을 살다가 단지 그 삶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삶을 기약하며 자신을 온전히 내어준다. 불교에서는 "윤회"라고 말하던가. 굳이 "윤회"라는 거창한 용어를 인용하지 않아도 "흐름", 알 수 없는 이 "사이클"은 사람이 혼자 살 수 없는 것처럼 지속되고 유지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인 것 같다. 그의 바탕은 "비움"이고 "내어줌"이다


"으아리 꽃"이 다시 돌아왔다. 지난 3월에 나의 첫 정원 매거진 글에 "으아리 꽃" 사진을 올렸는데, 오늘 아침 으아리 사진을 찍고 보니, 똑같이 돌아온 것 같은 우스운 생각이 든다. 3월에 올린 사진은 작년 비 오는 날 아침에 찍은 것이고, 오늘 아침은 일 년 만에 다시 찍은 것이다. 우연하게도 같은 비 오는 날 아침 사진이다. "으아리 꽃"은 올해는 정확하게 지난주 수요일, 5월 12일에 꽃이 피었다. 예의 그 진한 분홍색을 선명하게 띈 큼지막한 꽃이었다. 이 아이는 올해 의아리일까 작년의 그 "으아리일까, 혹은 그 전해의 으아리일까. 물론 올해 핀 싱싱한 "으아리 꽃"이지만, 2년 전 으아리도, 작년의 으아리도 이 아이 안에 있는 것이다. "현재"로 남아 있다.


이파리는 더 자라고, 성장해서, 혹은 퇴보하기도 하면서 새로운 꽃을 피운다.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 해도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자신의 표가 나지 않는 흔적들이 남는다. 남길 수 없는 흔적이라도 요란하게 남겨서 내가 온 티를 내려는 것은 사람에 불과한 일인지도 모른다


"태어남"이란 여러 가지 신묘막측한, 이해하기 어려운 신비로 이루어진 일이지만, 내 속에 어머니 아버지가 있고, 할아버지 할머니가 있고, 자식과 어쩌면 증손자 현 손자도 들어 있다. 무엇이 가장 소중한 것일까. 이렇게 빽빽이 들어선 마당 안에서도 각자의 영역을 해치지 않으면서, "난 바"를 해내는 초목들처럼 우리네 삶도 어디에서 태어났느냐에 따라 달라지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론이 없는 마지막에 도달하게 될 때마다 결국 순환의 생을 사랑하게 되는 경험을 하지 않는가.

조금만 더 깊이 생각하고 멀리 바라본다면 지금 내 옆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고 끌어안을 수밖에 없을 것만 같다. 어릴 적 즐겨 불렀던 동요가 입가에 맴도는 약비 날리는 아침이다.


"솔솔 봄비가 내렸다~

나무마다 손자욱이 보~이네

아~ 어여쁜 초록 손자욱

누구, 누구 손길일까

나는 알지~

아무도 몰래 어루만진

봄님의 손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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