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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pera Nov 20. 2023

80일간의 서울일주를 마치고...


계획하지 않았던 80일간의 서울살이를 하고 내려왔다.

초록이 무성했던 마당은 스산한 바람에 어울리는 바싹 마른 붉고 누런 잎들로 채워져 있고 맨 몸뚱이 나무가 외로울세라 바스락거리는 낙엽 이불은 마당 곳곳을 포근하게 덮어주고 있었다.

몇 그루 산딸나무는 벌써 꽃 몽우리가 단단히 맺혀 겨울도 맞기 전 내년 봄을 준비하고 있고, 비쩍 마른 칠자화는 우리에게 보여주려 작정이라도 한 듯 말라버린 붉은 꽃송이라도 보내지 못하고 품고 있었다.

잎의 색이 세 번씩이나 변한다는 플라밍고는 다듬어지지 않아 막자란 모습으로 담장너머까지 가지를 뻗치고 있다.


한결같은 장미는 찬바람에도 아랑곳 않고 걸친  하나 없는 몸뚱이에 분홍꽃, 붉은 꽃을 몇 송이 달고 있다.

여름 내내 줄기차게 꽃을 피웠던 서양으아리는 머루와 경쟁이라도 하듯 정원 가제보처마를 덩굴로 채우고 있다.

온 마당을 붉게 물들여 제 몫을 다한 배롱나무는 옷을 갈아입고 떨어진 꽃자리에 마른 씨앗으로 채우고 있다.

이미 까맣게 익어버린 씨앗봉지를 한가득 머금고 있는 메리골드는 여기저기 채워있고, 해맑았던 수국은 마른 꽃덩어리 그대로 곱게도 마당을 장식해 주고 있다.


모두제 역할을 다하고 이제 다가올 겨울을 견뎌 낼 준비만 남아있다는 듯 무거운 고요함이 덮인 마당에서

한쪽 벽에 기대어 뽀샤시한 얼굴을 흔들거리며 반갑게 인사하는 아이가 있다.

지난 5월에 심었던 향기글라디올러스.

여름 꽃임에도 8월까지도 촉만 올라오고 꽃필 생각도 없었던 아이였는데, 미안하기라도 했던지 고개 숙인 모습으로 하얀 꽃을 피웠다.

이 추운 날 기다리기라도 했던 것 같은 그 모습이 애처롭고 고맙고 거룩해 보이기까지 한다.


해마다 맞이하는 가을 풍경의 마당이지만 

해마다 같지 않은 것이 신기하다.

마당에 살고 있는 아이들은 항상 그 자리에 있는 망부석 같아 보여도 자신들은 오히려 자연의 변화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며 적절히 대응해 가는 삶을 이어 간다고 말하는 것 같다, 보일 듯 말 듯한 자람과 이어짐으로 조용히 성숙해 가기 때문이 아닐까.

무엇보다도 잠시라도 집을 비운 사람들에, 섭섭해하지 않고 제 삶을 온전하게 살며 기다려 준 모습이 마음깊이  고마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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