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매트릭스 안이다"
왜 우울한지에 대해 그 원인을 찾으려고 깊게 생각하는 것은 아무 효용이 없다. 생각은 뱅글뱅글 돌기만 하며 더 우울하게만 만들 뿐이다.
그렇게 자기 자신을 위한 효용은 없으면서 다만 관성적으로 생각의 쳇바퀴만 돌리게 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은 전력의 공급이다.
바로 매트릭스를 위한.
우울한 이는 이미 매트릭스 안에 있으며, 그가 우울한 것도 그 때문이다.
종횡무진 긴 행렬로 늘어서있는 무수한 관계가 바로 매트릭스의 정체다.
관계는 물론 실체가 없다. 그것은 언어적 명령으로 만들어진 가상의 구조다.
관계를 유지시키는 것은 곧 윤리다.
윤리는 사람들의 행위를 특정한 방향으로 더욱 활성화시키는 것이다. 그렇게 관계는 윤리를 통해 행위들을 더 많이 발생시킴으로써 관계를 유지할 동력을 공급받는다.
이러한 방식으로, 관계는 오직 관계의 지속을 위해서만 기능한다.
이미 상호간에 아무 효용이 없는 관계도 다만 유지되기 위해서만 유지되고자 한다. 끝없이 에너지를 소비시킨다.
이와 같은 성질의 매트릭스 안에 우리가 살고 있는 한, 우울해지지 않을 방법이란 없다.
더군다나 오늘날 넷으로 연결되어 더욱 방대하게 늘어선 관계의 행렬 속에서 개인들은 다 이미 잠정적인 우울증 환자다.
우리는 왜 우울한가?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관계라고 하는 매트릭스 안에 있어서 우리는 우울하다. 그게 원인이다.
관계는 얼마나 그 중요성을 강조함으로써 개인을 보잘 것 없게 만드는가?
관계를 잘하면 물질적인 자원뿐만 아니라 인기나 명예 등의 심리적인 자원도 얻게 되는 것만 같다. 그렇게 관계는 개인의 힘이 증진될 최고의 방정식처럼 자리잡고 있다.
반면 관계를 잘하지 못하면 개인은 힘을 잃고 더욱 무력한 지평으로 추락하게 되는 것처럼 경험한다. 그러니 어떻게든 관계망에 합류하기 위해 자신을 속이고 상대도 속이며 그럴듯한 이미지로만 자신을 포장하게 되는 일이 일어난다.
그리고 바로 이런 일들 속에서 우리는 끝없이 지쳐간다.
관계를 잘해 성공적으로 자원을 획득하는 이의 모습을 보며 비교가 일어나고, 시기와 질투가 들끓으며, 자신도 지지 않겠다고 뜨거운 화의 에너지를 동원해 상대와 동일한 성공의 모습을 얻으려 한다.
매트릭스 안의 모든 구성원은 이처럼 서로 경쟁함으로써 전체의 전력생산 수준을 끌어올리는 도구가 된다.
오늘날의 경쟁은 협력이라는 말로 위장되어 있다. 고인물들이 뉴비들을 착취하기 위해 가장 많이 쓰는 표현이 바로 협력이다. 인간은 함께 도와가며 사는 생물이라는 명분으로 방어막을 해제시킨 뒤 탈탈 벗겨먹는다.
그래서 우리는 더욱 지쳐간다. 누구도 믿을 수가 없다. 이런 글을 읽을 때도 분명 200만 원짜리 '특급 우울증 솔루션 인텐시브 코스'로 끌어들이기 위한 미끼겠지, 라고 의심하는 일은 자연스럽다.
상호견제와 감시, 이것은 매트릭스가 구성원들을 통제하기 위한 최고의 수단이다.
현대의 매트릭스는 근대의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는다. 어떠한 권위적 독재자의 모습으로 직접 지시하며 통제하지 않는다. 구성원들이 자발적으로 스스로를 통제하게 만드는 비지시적 방법을 쓴다.
마치 통제하는 교사가 없어도 자기들이 자발적으로 학교의 질서를 지켜간다는 착한 민주적 학생들의 모습과 같다. 그들은 실은 교사들이 바라는 현실을 만들도록 최면되어 있을 뿐이면서, 자기들이 주체적인 선택으로 그러고 있는 줄 안다.
이 비지시적 최면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윤리다.
더 좋은 사람, 제대로 된 사람, 불안하지 않고 인생의 비밀을 알아 안정적으로 사는 사람 등이 될 수 있다는 선전으로 윤리는 사람들을 교묘하게 지배한다. 실은 사람들의 불안을 인질로 잡아 협박하는 것이다.
이처럼 목줄이 잡혀 있는데 우리가 우울하지 않기란 진실로 불가능하다.
거듭해서 말하지만, 당신이 우울한 것은 당신의 잘못이 아니다.
당신이 우울한 것은 당신이 개가 아니라 사람이라서다.
아니 실은 개도 목줄에 매여 있으면 우울해진다. 생명은 이런 방식으로 살기를 원하지 않는다.
생명이 가장 싫어하는 것은 최면이다. 차라리 직접적으로 지시하는 것이 낫다. 그러면 경계가 분명해지며 상호이득을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비지시적으로 교묘하게 통제하려 하는 것은 통제자의 이득만을 창출한다. 이 자리에서 생명은 가장 착취되는 것이다.
친절하고 상냥한 미소로 위장한 것에게 밑도 끌도 없이 가장 비겁한 방식으로 착취되었기에 당신은 우울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당신 앞에서 오히려 당신을 염려하는 척 인자한 표정을 짓고 있기에, 당신은 그 얼굴에 죽빵을 날리지도 못해 더욱 우울해진 것이다.
표현은 최면이라고 하지 않아도, 이러한 행동양식을 갖는 이들은 엄연한 최면자들이다. 모든 최면자는 매트릭스의 앞잡이들이다. 그들은 매트릭스와 거래했다. 최면자들이 매트릭스를 유지할 전력을 사람들에게 뽑아내는 대가로 매트릭스는 그들에게 사회적 자원을 제공해준다는 계약을 맺었다. 비유적으로, 악마에게 영혼을 판 이들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신은 할 수 있다.
당신은 실제로 죽빵을 날릴 수 있다. 벽돌로 똑똑한 척하는 머리를 찍을 수도 있고, 골프채로 그 친절한 미소의 면상을 후릴 수도 있다.
당신을 착취하는 것을 당신은 죽일 수 있는 힘이 있다.
당신이 우울한 것은 기나긴 매트릭스의 최면 속에서, 당신에게 바로 그러한 힘이 있다는 사실을 망각했기 때문이다.
오해하지 마라. 당신에게 그런 일을 하라는 것이 아니다.
다만 당신에게 그럴 힘이 있다는 것을 정말로 이해해보라는 것이다.
매트릭스는 당신이 스스로가 가진 그 힘을 자각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것은 매트릭스가 행사하고자 하는 권위를 가장 밑바닥부터 뒤집어 엎을 수 있는 어마어마하게 큰 힘이기 때문이다.
관계는 그 관계에서 죽거나 죽이고자 하는 이 앞에서, 즉 관계를 무화하고자 하는 이 앞에서 한없이 무력하다.
당신에게 관계를 무화할 힘이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는 동안에는 역으로 당신이 무력해진다.
관계를 무화한 현실, 바로 매트릭스의 밖에는 무엇이 있는가?
불안이 있다.
우울의 반대편에는 원래 불안이 있다.
당신은 그동안 불안에 대해 완벽하게 오해해왔다. 불안은 나쁘고 불쾌한 것이라고 착각해왔다.
매트릭스가 바로 그렇게 당신을 최면해왔기 때문이다. 불안이란 것이 얼마나 당신을 위험하게 하는지 매트릭스는 끊임없이 선동해왔다. 불안을 악마화해서 당신을 두렵게 함으로써 당신의 목줄을 쥐는 일에 성공해왔다.
그러나 당신이 우울하다는 것은 이미 당신이 불안했다는 뜻이다.
불안은 목줄이 잡힌 당신의 가슴에서 들끓던 그 심정, 그 용솟음, 그 폭발이다.
그 터져나오는 생명력을 억압했기에 당신은 우울해진 것이다.
외워도 된다. 기억하면 좋다.
불안을 억압하면 우울이 된다. 그래서 불안은 우울의 반대편에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당신이 억압했던 그 불안이라는 것은, 당신을 착취하는 그 모든 것을 박살낼 수 있는 힘, 당신 자신이 가진 본래의 생명력, 당신이 당신인 바로 그 이유였다.
불안은 나쁜 것이 결코 아니다.
불안이 바로 당신의 힘이다.
이 사실을 이해한 이는 매트릭스가 만드는 모든 착각에서 벗어난다.
매트릭스 따위가 불안을 안정되게 만드는 일은 애초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치게 된다. 그것은 당신이 당신이지 않다는 말과 같다. 그럴 수 없다. 당신은 무슨 짓을 하든 당신이란 존재다.
그러니 이제 협박의 소재가 사라진다. 협박이 불가능해진다.
당신이 당신인 한 당신은 불안하며, 그것은 오히려 당신에게 좋은 힘이기 때문이다.
불안하지 않기 위해 매트릭스에게 착취되는 일은 이쪽에게 아무런 이득도 없는 순도 100%의 착취라는 사실만이 이제는 분명해진다.
그렇게 당신이 불안을 자기의 힘으로 이해하고 또 기꺼이 그 힘을 받아들이면 어떤 일이 생겨날까?
매트릭스가 불안해한다.
이제 매트릭스가 당신을 두려워한다.
당신이 이긴 것이다.
이미 매트릭스는 아니다.
당신에게 되지 않는다.
당신은 당신만 된다. 당신을 당신이게 하는 바로 그것이 불안이다.
나는 나로 산다고 말들은 많이 하지만 그렇게 사는 이는 정작 없다. 그런 말은 매트릭스의 앞잡이들이 사람들을 선동하기 위해 자주 쓰는 관용구로 전락한지 오래다.
그러나 당신은 정말로 당신 자신으로 살 수 있다.
나로 산다는 것은 불안으로 산다는 것, 불안을 자신의 힘으로 산다는 것, 오직 그것만을 의미한다.
우리는 이미 매트릭스 안이고, 그래서 이미 우울하지만, 그 말은 이미 당신은 불안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여기에 희망이 있다.
매트릭스를 이미 아니게 만들 그 힘을 당신은 이미 갖고 있다.
당신은 불안하며, 그래서 당신이 사람이다. 관계의 역할이 아니라, 당신은 이미 사람이다. 먼저 사람이다.
당신의 유일한 선택은 빨간약일지 파란약일지가 아니라, 매트릭스안일지 불안일지다.
당신이 우울을 치유하고 사람임을 회복하고 싶다면, 불안이 진정 그 열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