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심리상담사의 우울 #4

"생각에 먹이를 주지 말기"

by 깨닫는마음씨




불교적 삶은 우울증에 정말 큰 도움이 된다.


이것은 명상적인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이지만, 서구 힐링문화에서 유행하는 패스트푸드식의 알아차림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메타인지와 같은 큰 생각으로 작은 생각으로 인한 근심을 덮는 방식이다. 생각의 세력만 더 강화된다.


우울의 회복에 정말로 필요한 것은 생각에 먹이를 주지 않는 것이다.


불교의 실천적인 핵심은 무엇인가?


생각과 사실을 구분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실을 사는 것이다.


이게 정말로 다다.


우울은 생각으로 사는 일이 지배적인 방식이 되어 있을 때 필연적으로 경험된다.


생각의 특성은 지속이다. 이것은 두 가지를 의미한다. 하나는 자신의 특정한 상태를 지속하기 위해 끊임없이 생각을 굴리게 되는 양상을 뜻하며, 또 하나는 생각 자체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끝없이 연쇄되는 성질을 뜻한다.


스즈키 선사는 불교를 한마디로 요약해달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이렇게 대답했다.


"늘 그렇지는 않다."


아주 지혜로운 문장이다. 세계와 삶의 실상을 이보다 더 잘 함축해서 묘사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우주의 제1법칙에 대한 묘사이기도 하다.


그러나 생각은 이에 반대되게 '늘 그러려고 한다.'


생각은 계속해서 가상의 실체성을 만들어내려고 한다. 실체라는 것은 어떤 변화에도 불구하고 늘 그 모습 그대로 유지된다고 믿어지는 것이다.


우리는 생각의 작용을 통해 자기 자신을 이러한 실체로 만들려는 경향성을 가진다.


그래서 붓다는 무아(無我)를 말한 것이다. 실체적 나라는 것은 그저 생각으로 만들어낸 허구의 이야기 속의 주인공 같은 것일 뿐, 사실적으로 그러한 나라는 것은 없다는 것을 알리려 했다.


이와 같은 실체적 나를 고집하고 있으면 반드시 우울해진다.


현실적인 이 몸은 하루하루 노화되며 그 상태들이 변화되어간다. 생물학적 조건뿐만이 아니라 이 몸을 둘러싼 사회문화적 환경도 늘 달라지기에, 몸은 현재의 상황에 적응하기 위해 또한 변화되어간다. 어떤 차원에서도 변화는 필연이다.


그러나 우리 자신이 이야기로 지어낸 실체적 나는 이 모든 변화에도 불구하고 유지되는 어떠한 내면의 중심인 것처럼 가장하곤 한다. 자기만은 어떤 변화 속에서도 늘 예쁘고, 똑똑하고, 멋지고, 귀엽고, 사랑받는 그 무엇이라는 식이다.


그렇게 실체적 나를 고집하는 이는 결국 전쟁을 시작하게 된다.


바로 시간과의 전쟁이다.


시간을 멈추려는 그 엄청난 일을 하기 위해 그는 심신양면으로 막대한 자원을 동원한다.


불가능한 일을 이루기 위해 가능한 모든 것을 낭비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둘 중의 하나다.


사기꾼이 되거나, 우울해지거나다.


당신이 우울하다면 최소 당신은 사기꾼은 아니라는 것이니, 이 점은 분명히 희망이다.


불교는 사람들이 다 깨닫도록 도울 수 있지만, 사기꾼에게만은 효과가 없다.


사기꾼은 가장 사실을 거부하며, 자신의 생각에 가장 큰 권위를 부여해 그 생각으로만 사는 자이기 때문이다.


생각으로 사는 것은 곧 이야기로 사는 것이다.


자기가 지어낸 이야기 또는 남이 지어낸 이야기에 입각해, 그러한 이야기들만을 소비하며 사는 삶은 근본적으로 자신의 인생[시간]에 사기를 치며 사는 삶이다.


이 승리할 수 없는 전쟁을 지속하다보면 반드시 우울해지기에, 그 우울감을 씻기 위해 더 큰 사기를 치게 된다. 더 큰 생각으로 작은 생각을 덮듯이, 더 큰 사기로 작은 사기를 덮는 것이다.


그러다가 인생의 마지막 순간이 찾아오면, 이러한 이는 자신이 평생 인생에 거짓말만 해오며 살았다는 것을 더는 회피할 수 없게 될 것이다. 통째로 잘못 살았다. 이러한 사실을 직감하고 있기에, 인생에 사기를 치는 이들은 늘 근본적인 두려움을 안고 산다. 그것을 생존의 불안과 두려움이라고도 착각한다.


그렇지 않고 거짓말을 하고 있어서, 자신의 삶을 속이고 있어서 두려워진 것이다.


생각이 받아먹는 가장 큰 먹이가 바로 이 거짓말이다.


생각은 사실을 받아먹을 수 없다. 단순하다. 사실은 생각보다 엄청 크고 강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실이 드러나면 생각은 그 앞에서 사라진다.


당신이 우울하다면 당신은 이제 사실을 살아야 한다.


사실을 쉽게 표현하면 '일어난 일'이다.


아무리 속상하고 못마땅해도 그것은 그렇게 일어난 일이다. 그것이 일어났다는 사실 자체를 거짓말로 부정하거나 회피하려 할수록 자신만 더욱 괴로워질 뿐이다.


여기에서 불교적 삶은 작동할 수 있다.


우선 당신은 자책을 멈추어야 한다.


당신이 잘못해서 일어난 일이 아니다. 당신의 잘못으로 어떠한 사실이 드러났다는 것은, 마치 당신의 잘못으로 태양이 동쪽에서 뜨게 되었다는 말과도 같다. 당신이 우주에서 가장 권위있는 전능자라는 주장과도 같다. 아주 오만한 얘기다.


이처럼 자책은 거의 대부분의 경우, 생각으로 만들어낸 실체적 나의 오만한 발상일 뿐이다.


그것을 먼저 끊어야 한다.


자책이라는 오만한 행위를 멈추고 당신이 해야 할 것은 그냥 보는 것이다.


대체 뭐가 일어났는지를, 그 사실이 당신에게 어떠한 것을 알리고 있는지를 다만 보는 것이다.


여기에서 본다는 표현은, 보이고 들리고 느껴지는 것을 그대로 보고 듣고 느낀다는 것을 의미한다.


제발 아무 것도 하지 마라.


해결하려고 하지 마라.


적당히 보고 듣고 느끼다가 생각으로 그 해결책을 구하려 하지 마라.


또는 자신이 그 모든 것을 품어준다며, 보고 듣고 느끼는 형식으로 마치 엄마가 못난 자식을 그 가슴에 온전히 담아내려는 듯한 삼류연극을 하지 마라. 이것은 버티고 인내하며 수용하는 일에 대한 것이 아니다. 모성놀이가 아니다.


당신이 가장 하지 말아야 할 것은, 적당히 보고 듣고 느끼다가, 아하, 하며 마치 뭘 깨닫게 된 것처럼 구는 것이다. 이제는 마음 다 보인다며 꼴값을 떠는 일이다.


이 모든 것이 바로 실체적 나라는 것이 다시 한 번 그 오만성으로 작동하는 방식들이다.


자본주의 영성문화에서의 패스트푸드 알아차림은 바로 이 실체적 나를 더욱 강화하기 위해 자주 남용된다.


이 비슷한 것들을 하고 있어서 당신은 아마도 심대히 우울해졌을 것이다.


작은 우울함을 덮으려고 큰 우울함을 불러왔던 것이다.


생각으로 사는 결과가 늘 이렇다.


당신은 더 단순하게 살 수도 있다. 우울한 늪이 아니라 경쾌한 나비처럼 살 수도 있다.


당신에게 일어난 일이 그 순간에는 불만족스럽고 속상할 수 있다. 작은 우울함의 이유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당신은 이것을 꼭 기억해야 한다.


당신은 시간을 살고 있다.


그 자리가 당신의 끝이 아니다.


당신은 계속 가야 할 것이다.


일어난 일, 즉 '사실'이란 하나의 징검돌과 같다.


당신은 그것을 밟아야 할 것이다. 그래야 다음 징검돌로 넘어갈 수 있다. 삶이 계속된다. 당신의 시간이 흐른다. 당신이 건너고 있는 그 강물처럼.


당신은 왜 하필이면 이러한 징검돌밖에 없었냐고 억울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해한다. 그러나 당신이 당신의 생각을 고집하며 걸어온 방향이 그 전까지 그러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지금 일어난 일은, 당신의 그 억지스러운 고집의 여정 속에서도, 어떻게든 당신이 강을 건널 수 있도록 돕기 위해 출현한 '최선의 수'일 수 있다.


당신이 자꾸만 물살은 센데 발을 디딜 만한 돌은 없는 방향으로 계속 걸어간 상황 속에서, 바로 그 뾰족한 돌만이 현재 당신을 위해 출현해준 유일한 징검돌이었던 것이다.


당신이 우울한 것은 그 돌 앞에서 오랜 시간 정체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신에게는 언제나 두 가지의 선택지가 있다.


잠깐 아플 수 있는 그 돌을 밟고 건너가든가, 아니면 그 자리에 눌러앉아 인생을 애씀없이 행복하게 건너는 방법에 대해 알려준다며 사기를 치는 것이다.


사실을 단순하게 살든가, 생각에 끝없이 먹이를 공급하든가, 이것만이 언제나 당신 인생의 선택지다.


당신이 이제는 사실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법은 간단하다.


그러한 당신은 과거에 했던 일들을 반복하지 않는다. 더는 하지 않는다.


또 그러한 당신에게는 순수하게 당신의 모든 과거가 어리석음으로 보이게 된다. 자책한다는 뜻이 아니다. 다시는 그렇게 살지 않으리라는 분명한 확인이다. 용광로에 더는 손을 넣지 않겠다는 아주 명료하고 단순한 사실의 확인이다.


반대로 당신이 여전히 생각에 먹이를 주는 방식은 이러하다.


용광로의 그 빛과 열기가 그리도 감동적이었다며, 용광로와 만났던 그 순간을 잊지 못하겠다며, 이제는 용광로의 온전함과 용광로의 위험성도 잘 알고 있는 자신이 되었으니 현명하게 용광로의 장단점을 통합해서 용광로와 함께 살 것이라는 식이다.


이제는 없는 과거의 용광로를 생각 속에서 붙잡으며, 그 생각을 지속하며, 생각만이 무럭무럭 꿈나무처럼 양육된다. 머지않아 무겁고 까만 우울의 열매들이 주렁주렁 맺힐 것이다.


불교는 언제나 당신이 현재를 사는 것이라고 말한다.


당신의 선택지는 사실로 펼쳐지는 현재인가, 생각으로 붙잡는 과거인가, 오직 이것뿐이다.


우울함은 분명 후자와만 관계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현재를 산다고 가장 많이 착각하는 방식이 있다. 그것은 마치 과거를 현재처럼 계속 지속하기 위한 생각으로 만들어진 이야기를 소비하며 사는 일이다. 그러나 이야기 자체가 과거의 것이다. 현재에는 이야기가 없다. 이야기를 실시간적인 소재로 소비한다고 현재를 사는 것은 아니다.


이러면 우울한데도 자기가 우울한 줄을 모르게 된다. 우리는 이것을 '익명의 우울증'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불교는 사실과 생각을 구분하며, 나아가 이야기를 끊는 전통이다.


그러니 익명의 우울증에도 효과적이다.


불교적 삶이 표면화된 우울이나 숨겨진 우울 어느 쪽에도 큰 도움이 되는 이유는 분명하다.


불교는 당신에게 현재 일어난 모든 일, 바로 당신의 모든 사실을 긍정하는 전통이기 때문이다.


불교는 차라리 당신이라는 엄연한 사실적 사태를 향한 하나의 미소와도 같다.


당신이 건너는 징검돌 하나하나마다 그 미소가 내려앉는다.


괜찮다고, 밟고 가볍게 넘어가자고, 여기가 당신의 끝이 아니라고, 당신이 가는 그 끝까지 긍정하며 함께할 미소다.


그게 본다는 것이며, 당신이 바로 그렇게 보이고 있는 것이다.


당신 존재의 사실이, 지금 흐르고 있기에 긍정되어 보이고 있는 것이다.


정체되어 있는 것은 긍정되지 않는다.


흐르는 것만 긍정된다. 과거와는 다른 그 흐름이 스스로를 긍정한다.


길게 꾸며내는 이야기로 자신을 긍정하는 것이 아니다. 이야기 없는 현재로만, 과거와는 다른 현재로만 인간은 긍정될 수 있다.


단순하고, 또 분명하게.


생각이 아니라, 당신 자신이 이제 긍정의 먹이를 받았다. 현재에 막 살려고 하는 당신을 현재가 축복한다.


용기를 내어 다음 징검돌로 건너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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