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심리상담사의 우울 #5

"선택하지 말고 그냥 멈춰라"

by 깨닫는마음씨




우울은 표지다.


당신이 갈림길 중에 어떤 길을 선택해야 한다는 표지판이 아니라, 지금 멈춰야 한다는 표지판이다.


우리가 자유롭게 자기의 인생을 선택해나가는 주체여야 한다는 아주 오래된 망상의 믿음이, 오늘날 우리 모두를 우울감으로 몰아넣는다.


이것은 인간에 대한 잘못된 자화상이다. 인간은 그런 존재가 아니며, 그럴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또한 세계는 서브웨이가 아니다.


빵은 요걸로 해주시고요, 야채는 다 넣어주시고, 소스는 요거랑 요거를 섞어주세요, 라며 주문을 마친 뒤, 자신이 얼마나 똑똑하게 주체적인 선택을 직접 해냈는지에 감격하고 뿌듯해하는 왕의 소꿉놀이를 위한 장소가 아니다.


이것은 마치 자기가 건강하고 현명한 선택들을 누적시켜 자신의 인생을 만들어나간다는 한 500년 전에 인간이 살던 방식이며, 그 착각이다.


내 생각으로 고유한 내 인생을 만든다, 이야기로 독립적인 나를 만든다 등의 얘기들은 다 이 500년 전의 부채들이다. 위대한 유산이 아니라 심각한 부채다.


티라노사우루스가 현대에 활동한다면 심히 우울감을 경험하지 않겠는가. 500년 전의 방식으로, 그것도 그 방식을 아주 진취적이고 잘난 방식으로 착각하며 살아간다면, 우울감을 느끼지 않기가 오히려 힘든 일이다.


소위 말하는 옵션질이, 개인을 능동적인 선택의 주체로 만들어주는 일인 것처럼 오해된다. 자기만의 커스텀오더를 통해 마치 게임캐릭터 장비를 착용하듯이 자기 자신을 고유하고 개성적인 존재로 만들어갈 수 있다고도 착각된다.


현대 자본주의시장의 마케팅전략이 성공적으로 기능해 자기가 왕인 줄 알게 된 정확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이 왕처럼 주체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성숙하고 지혜로운 존재가 된 것 같은 착각을 제공해야만 사람들은 더 많이 지갑을 연다. 소비자는 왕이라는 말의 참뜻이다. 왕이라는 이름을 가진 더 많은 노예들을 양산함으로써 현대사회는 지속되고자 한다.


노예들은 서로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자주 들려준다.


AI처럼 피동적으로 살지 말고, 자신이 직접 자신의 길을 선택해서 걸어가는 능동적 주체가 되어야 한다고.


그러나 이러한 '선택하는 주체'의 개념 자체가 환상이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마치 주체 앞에 놓인 선택지처럼 가정하며 그 환상을 소비하는 데 너무 많은 에너지를 낭비한다.


사실적으로는 애초 선택이 아닌 것들에 대해 그것을 선택처럼 만들며 더욱 힘들게 사는 셈이다.


우리 앞에서 펼쳐지는 상황을 늘 A와 B가 대립되는 상황으로 보는 근대의 변증법적 인식은 지배적으로 우리에게 자리잡았다. 그리고 A와 B 중에 더 올바르고 좋은 것을 선택하는 이 과정의 연쇄가 바로 삶이라며 거짓된 이름을 붙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런 것은 실제의 삶이 아니다.


이런 주체놀이야말로 우리가 정보처리기계로 사는 가상현실이다.


인간이 기계로 살면 엄청나게 힘들다. 자신이 올바른 선택을 하지 못할까봐 늘 초조하며 쫓기는 기분이 든다. 자기 빼고 남들은 다 주체적으로 잘 선택하는 것 같아 질투도 나고 시기심도 생긴다. 경쟁의식이 팽배해지며, 전쟁터에서처럼 몸은 항시 긴장된다. 이미 절반은 우울해졌을 것이다.


그러다가 이 선택의 가상현실에 대한 솔루션이랍시고 자주 제안되는 방법론이 있다.


그것은 바로 통합적 선택의 방법론이다.


A와 B 사이에서의 선택은 진정한 선택이 아니라고, 그것은 이원론적인 유치한 발상이라고 말하며 이 주장은 시작된다.


A와 B를 마치 선과 악처럼 보며 둘 중의 하나를 꼭 나쁜 놈으로 만들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고도 말한다. 눈이 와서 기뻐하는 사람들에게, 저 눈을 쓸어야 할 환경미화원의 그 약함의 아픔도 함께 이해해야 한다고 부드럽게 타이르며, 마치 철없는 아이들을 대하는 것 같은 황희정승의 표정으로.


그렇게 진정한 선택은 A의 온전함과 B의 온전함을 동시에 다 알아주는 것이며, 나아가 A가 온전하기에 B도 온전할 수 있는 것이고 B가 온전하기에 A도 온전할 수 있는 것이라며, 이 자비로운 천재대현자는 마치 우주의 숨겨진 고급정보를 공개하기라도 하듯이 호들갑을 떨며 이러한 주장을 한다.


그러나 이것은 생각으로 생각을 해결하려는 생각놀이에 불과하며, 그렇게 다만 자기가 남들보다 더 크고 좋은 생각을 할 줄 아는 똘똘이스머프의 권위를 얻고 싶어 시도하는 방법론일 뿐이다. 그게 유일한 이득이다.


그리고 이 정신승리 비슷한 이득을 얻는 대가로 우리는 심각한 우울증에 빠지게 된다.


이것은 애초에 선택도 아닌 삶을 선택지처럼 만든 뒤, 그 선택지를 동시에 다 선택하겠다고 하는 발상이기 때문이다.


다 선택하면 무슨 일이 생기겠는가?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든다. 그리고 되는 것은 없다.


과학자도 되고, 대통령도 되고, 연예인도 되겠다는 초등학생이 있다. 정말로 그 모든 것이 다 되겠다고 살면 아마 10년 안에 소진되어 죽을 것이다.


애초에 될 수 없는 것을 거짓의 생각으로 된다고 하고 있으면, 그 삶이 막히고 무거워지는 것은 당연하다. 우울은 필연이다.


상대되는 대극 중의 하나를 선택하려다가, 이제는 그 모든 대극을 다 선택하겠다고 하는 이 방식은, 우리가 반드시 '선택하는 주체'여야 한다는 집착에서 비롯한다.


이와 같은 류의 집착은 많은 경우 자기에게 선택권을 주지 않았던 부모에 대해 저항하며, 자기는 이제 독립적으로 자기만의 길을 가겠다고 하는 이들에게서 빈번하게 드러난다. 자신이 주체가 되어 다양한 옵션들의 선택권을 발동하는 행위를 부모의 지배에서 벗어날 독립투사의 활동처럼 간주하는 것이다.


그래서 또한 이러한 이들은 스스로를 타인에게 다양한 선택지를 제공할 수 있는 '좋은 부모'의 모습으로 꿈꾸기도 한다. 자기는 민주적으로 사람들이 다양한 그 자신의 생각들을 펼칠 수 있도록 다 허용하며 들어준다는 식이다.


독립투사든 좋은 부모든 어느 쪽이나 더욱 빠르게 우울에 빠져들 수 있는 길이다. 사실이 아닌 환상에 에너지를 막대하게 투여하고 있으면 우울해지는 것은 필연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선택지를 많이 주는 것이 좋은 부모도 아니다. 좋은 부모는 선택지가 아니라 돈을 많이 주는 부모다. 누구나 다 안다. 그렇지 않은가? 선택하는 주체의 개념이 시장경제에서 기인했다는 점을 이해해보면, 돈을 많이 주는 부모야말로 정말로 자식의 백화점 쇼핑 같은 주체놀이를 가능하게 해주는 부모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결국 모든 것을 다 선택하겠다는 통합의 발상은 자신에게 돈을 많이 주지 않은 부모에 대한 저항의 산물이라고도 할 수 있다. 고급언어로 치장한 포장지를 벗겨내면 고작해야 이 정도의 유치한 일이다. 여기에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고 있다면 그 인생은 진실로 우울한 것이다.


이 삶의 속성이 선택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면 어떻겠는가.


삶은 사실을 자연스럽게 사는 것이지, 선택을 억지스럽게 사는 것이 아니다.


삶의 자연스러움을 잃었을 때 생기는 것이 고통이다.


고통이 일어나는 구조가 지속될 때 생기는 것이 또한 우울함이다.


곧, 우울은 고통 속에 자기 자신을 방치하고 있는 상태와도 같다.


고통은 어떻게 일어나는가의 그 구조를 이해해보자.


이를테면 어떤 이가 가진 것이 없다. 쌓은 자원이 없다. 그러나 남들처럼 자기도 좋은 집에 살고 싶고 애인도 만들고 싶다. 그래서 그는 거짓말을 시작한다. 결국 자신의 거짓말로 남들의 것을 빼앗아 자원을 얻는 일에 성공한 이는 그 순간을 영광된 순간이라고 경험하기도 할 것이다. 자기의 노력으로 뭔가를 주체적으로 이룬 것만 같아 뿌듯하다. 그러나 이러한 이는 쓰레기 사기꾼이라고 불리게 될 것이다.


그 자신이 이러한 방식을 성공의 영광이라고 지속하는 한, 그가 쓰레기가 아닐 방법은 없다.


영광도 온전하고, 쓰레기도 온전하니, 다 온전한 것이 아니다. 또는 겸손하게 영광을 30% 정도만 취해서 쓰레기도 30%만 되는 지혜로운 통합책이 있는 것도 아니다.


통째로 영광의 쾌락일 것이며, 통째로 쓰레기의 고통일 것이다.


쾌락과 고통이 동시에 발생하는 것이 삶이다.


쾌락을 추구하는 만큼 동일한 크기로 고통받는 것이 삶이다. 불교는 이 사실에 대해 2500년 전부터 얘기해왔다.


이 삶의 사실성에 대해, 쾌락만을 남기고 고통만을 제거하고자 만들어낸 가상의 통합적 솔루션이 바로 이야기다. 이야기는 좋은 것만 선별적으로 취하고자 한 편집의 결과물이다. 삶을 부정하고 오히려 자신이 삶을 대체하고자 하는 그 의도로 이야기는 자주 남용된다.


그러나 어떤 통합적 솔루션의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해도 실제의 고통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자신에게 쾌락을 주기에 곧 자신에게 고통을 주게 되는 그 일 자체를 멈추기 전까지는 고통은 사라지지 않는다.


쾌락만을 남기고 고통만을 제거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과거를 편집해 만든 이야기로 자신의 어떤 과거를 돌아보며, 온갖 영광된 미화를 하곤 한다. 마치 그 시절엔 아름다운 즐거움과 행복만이 있던 것처럼, 그때가 자신이 진정한 자신으로 빛나던 시절이었던 것처럼.


그리고는 그 과거의 이야기에 입각해 현재의 자신을 평가하며 짓누른다. 그러다가 마치 뭔가를 깨닫기라도 한 것처럼 반전해서, 자신을 이렇게 불쌍하게 대해야 할 것이 아니라 그때의 자신을 다시 찾아 당당하게 진정한 자신으로 살면 되는 일이었다며, 갑자기 자리에서 발기차게 일어나 세상에 자신을 외치기 시작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롤러코스터를 타며 온갖 쇼를 하는 것이 우울증의 상태다.


그때의 자신이 지속되지 못했던 것은 엄청난 고통 때문이었다는 사실은 철저히 망각된 상태다.


그러한 인생에서 부정할 수 없는 결과는 고통, 오직 그것일 뿐이었다.


그렇게 살면 고통스럽다, 오직 이 사실만이 분명했을 뿐이다.


누군가가 우리에게 하루에 한 번 손톱 열 개를 마취없이 다 뽑는 대신에 그 대가로 매일 100만 원을 주겠다고 한다.


한 이틀 정도 해보다가 너무 고통스러워서 우리는 그만 하겠다고 말한다. 그리고는 10년이 지난 뒤, 그 시절이 좋았다고, 그때는 일하지 않아도 하루에 100만 원씩 들어오던 시절이었다고, 참 그립다고 아련하게 회상을 한다. 지금은 왜 그때와 같이 세상이 좋은 부모처럼 자신을 사랑해주지 않는지 모르겠다며, 매일매일 우울감에 젖어든다.


이것은 이러한 정신병이다.


고통은 몸의 문제라 쉽게 잊히지만, 쾌락의 망상은 생각의 작용으로 오래 가는 까닭이다.


당신이 우울할 때, 당신 앞에는 쾌락으로 가는 길과, 고통으로 가는 길의 선택지가 놓여 있는 것이 아니다.


우울은 당신이 지금 그 하나의 길로 가지 말라고 놓여 있는 표지판이다.


갈림길처럼 착각되어 보여도 그것들은 다 동일한 고통의 길이다.


얼마나 더 고통받아야 당신은 그 길이 순도 100%의 고통의 길이라는 사실을 스스로에게 분명하게 알려줄 수 있을까. 우울은 어쩌면 지금이 그때라는 뜻일 것이다.


역으로 말하면, 당신은 지금까지 그렇게 아주 큰 고통만을 받아왔고, 그런 것을 삶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렇지 않다.


당신은 행복할 수 있다.


당신이 행복할 수 없다면, 나는 이런 글을 뭐하러 쓰고 있겠는가.


행복은 당신의 선택이 아니다.


당신에게 이미 선택되어 있는 것이다.


실존주의와 불교는 굳이 선택이라고 표현한다면, 바로 이 선택되어 있는 것을 선택하는 방식을 말하고자 한다. 이것은 주체의 선택이 아니다. 존재의 선택을 따르는 길이다. 존재는 많은 경우 주체의 선택 자체를 다 기각시킨다.


억지로 고민하며 어떤 것을 주체적으로 선택해야 한다고 믿는 상태에 몰려 있는 경우라면, 특히나 선택 자체를 단순하게 멈추며 모든 선택지를 다 기각하는 일은 이미 선택되어 있다.


짜장면을 먹을지 짬뽕을 먹을지를 심각하게 고민하며 점심시간을 다 버리고 있는 이는, 실은 아무 것도 먹고 싶지 않은 상태일지 모른다. 거의 그럴 것이다. 남들 다 하니 내 자신도 선택해야 하는 것이 아니며, 선택할 수 있는 성숙한 주체처럼 보이기 위해 선택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몸의 자연스러운 상태에 따라 이미 선택되어 있다. 그 사실에만 정직하면 된다.


그러면 행복해진다.


당신이 인간이기에 행복은 당신에게 자연스러운 것이다. 당신이 자연스럽게 사실을 살 때 사실적으로 당연한 당신의 것이다.


당신이 무수하게도 갔던 그 고통의 길 앞에서, 이제는 당신이 우울해졌다는 것은 어찌보면 다행이기도 하다.


그 우울도 자연스럽다.


자연스럽게 그 길을 가지 않으면 된다는 뜻이다.


우울하지 않을 삶이 당신에게는 이미 선택되어 있다.


이제 멈춘 뒤, 당신의 자연스러운 행복을 향해서만 돌아서자. 고통 속에 방치되어 있던 당신 자신을 이제는 만나러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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