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고 자고 싸는 일"
상담은 다 먹고 자고 싸는 일에 대한 것이다.
아니, 마음이라는 것이 다 먹고 자고 싸는 일에 대한 것이다.
어떤 과거의 기억이나, 좌절된 욕망이나, 자신이 만들고 싶은 자신의 인생이야기 등은 실제의 마음과 아무 관련이 없다. 그런 것은 다 공중에 붕붕 떠있는 생각의 소재일 뿐이다.
상담은 이런 것들을 다 지상으로 끌어내린다.
먹고 자고 싸는 일 중 현재 어떤 것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지를 명확히 하고자 한다.
즉, 자율신경계가 잘 작동하는가를 확인하려는 것이다.
'자율'은 실존주의에서 말하는 '자유'와 동일한 것이다.
자율성이 무너져 있을 때 우리는 둘 중에 하나다.
자신이 모든 것을 통제하려 하거나, 또는 자신을 통제하려고 하는 것에 저항해 자신의 자유를 추구하겠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 두 방식의 공통적인 이름이 바로 '통제'다. '자율'의 반대어다.
통제의 반대편에서 자유를 추구하겠다고 하는 것은 근대적 자유의 방식이다. 이것이야말로 실은 가장 통제적인 것이다. 이것은 쉽게 말해 자신을 통제하는 것보다 자신이 더 높은 권위를 가짐으로써 다 자신의 생각대로 하겠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러한 자유의 개념을 정말로 '자유'라고 여기며 실현하려고 하고 있을 때 우울증의 조건은 마련된다.
'우울은 통제의 질환'이다.
통제하려고 하면 필히 우울해진다.
통제를 벗어나 주체적으로 자유롭고자 하면 가장 우울해진다.
노골적인 통제든, 자유라는 이름의 통제든, 다 사실적으로 가능하지 않은 허구의 것들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허구를 살수록 우울해진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런 차원에서 '우울은 허구의 질환'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한번 계속 통제하려고 해보라.
또는 모든 것이 다 주체적인 아이들처럼 스스로 알아서 자유롭게 활동하도록 허용한다는 방식으로 은밀하게 숨은 통제를 계속 시도해보라.
엄청난 크기의 벽을 맞닥뜨리게 될 것이다. 반드시 그 삶이 막힐 것이다. 왜 생각대로 통제되지 않는지 짜증만 가득해질 것이다.
그렇게 통제하면 할수록 우리는 통제력을 잃어간다.
통제력을 잃으니 더욱 통제하려는 일에 집착하게 된다.
머리는 뱅글뱅글, 늘 상기된 기운 속에서 어떻게든 다시 모든 것에 대한 통제력을 회복하려는 그 일을 위해서만 모든 자원과 에너지를 동원하게 된다. 소위 주식에서 뇌동매매라고 부르는 상황과도 같다.
가진 것은 다 써가는데 결과는 나오지 않으니 그 자리에서는 반드시 무기력해진다. 빠르게 소진되어 재만 남는다. 모든 것이 실감나지 않고 멍하니 부유하기만 하는 유령 같은 상태다.
유령은 먹고 자고 싸지 않는다. 정확하게는 그것이 삶이라는 것을 잊었다.
가장 비극적으로 잊은 것은 자신이 얼마나 삶을 좋아하는지다.
먹고 자고 싸는 일들을 당신이 얼마나 좋아하는지를 잊고 있다면, 당신은 우울한 상태가 맞다.
그 대산에 당신은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려고 하고 있을 수 있다.
이것은 가장 이상적으로 가정된 주체의 모습이다.
자신이 주체적으로 먹고, 자신이 주체적으로 기도하며, 자신이 주체적으로 사랑하는 당신은 자유로운 인생의 주인공이라고 불릴 것이며, 세상은 그런 당신을 위해 활짝 펼쳐진 무대다.
오, 이런 환상이 진정 당신을 얼마나 우울하게 만들었는가.
당신이 하는 것이 아니라 자율적으로 그 몸에서 이루어지던 가장 멋진 일들을, 당신은 어떻게 당신이 직접 해야 하는 노동으로 바꾸어 놓았는가.
배고플 때 먹고, 졸릴 때 자고, 마려울 때 싸는 것은 선(禪)이라고 불린다. 불교의 정수다.
불교는 인간이 무엇인지를 바로 알리는 전통이며, 이것은 그래서 또한 인간의 정수다.
문명은 당신이 배고플 때 먹으면 안되고, 졸릴 때 자면 안되며, 마려울 때 싸면 안된다고 당신을 훈육해왔다.
문명이 정한 규범에 따라 그 모든 것을 해야 한다며 당신을 통제해왔다.
그리고 결국 당신이 당신을 통제하는 그 규범에 저항하게끔 안내해왔다.
저항하는 당신은 이제 자발적으로 당신이 직접 정한 자신의 규범에 따라 직접 먹을 것이고, 직접 잘 것이며, 직접 쌀 것이라고 당당하게 외치게 되었다.
자신을 위하지 않는 남의 규범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자신의 규범을 창조하며 지켜가는 성숙한 어른으로 거듭나겠다고 그 가슴에 힘차게 다짐했다.
그렇게 당신은 누구보다도 규범을 지키는 자가 되었다. 규범에 따라서만 모든 것을 행위하는 자가 되었다.
당신을 계몽하고 윤리화하려던 문명의 목적이 성공적으로 달성된 것이다.
자신은 분명 건강하고 착한 주체로 자신이 정한 규범을 따라 잘 살고 있는 것 같은데 왜 이렇게 답답하고 막힌 기분인지 모르겠다고 보고하는 것은 우울증의 전형적인 상태다.
이러한 차원에서 분명 '우울은 문명의 질환'이다.
문명은 자율성을 싫어한다. 자율성을 자각하는 이는 통제하기에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문명은 자율성을 둘로 쪼갰다. 통제와 자유라는 이름으로. 그리고는 그 둘을 싸우게 함으로써 자율성 자체가 힘을 잃게 만들었다.
문명은 스스로 악역을 자처해 사람들을 통제하고, 그 끝에 반드시 사람들의 자유가 이기게 하는 그림을 설계했다.
사람들은 선이 이겼다며, 자신이 마침내 주체적인 자유를 획득했다며, 이제는 자신만의 길을 간다고 감격스러워했지만, 그들에게는 사실 어느 곳으로도 갈 동력이 없었다.
그 자리에 머물며, 문명이 엄마처럼 자신을 통제하던 그 방식을 똑같이 흉내내 자신에게 적용하며 그런 것을 자유라고 말할 뿐이었다. 엄마의 집 바로 옆에서 자취하는 아이의 모습처럼.
이 모든 것이 문명의 빅픽쳐였던 것이다.
그렇다고 문명이 나쁜 놈인 것은 아니다.
문명은 인간의 생존율을 비약적으로 증대시켰다. 다만 그 담보로 인간의 자율성을 저당잡았을 뿐이다.
우울은 우리가 자율성[실존적 자유]을 포기한 대가로 생존의 안정성을 획득하고자 한 사회계약의 결과다.
그러나 오늘날 인구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함에 따라, 이 계약의 가치가 불공정하게 의심되기 시작했다.
담보의 크기와 이득의 크기가 맞지 않는 것으로 경험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기성사회의 문법에서 벗어나, 자기들만의 새로운 규범이 작동하는 공동체를 꿈꾸기도 했다. 저당잡은 담보에 상응하는 이득을 돌려받을 수 있다는 선전문구로 공동체의 세를 키우고자 했다. "우리 모두가 너를 지켜줄 거야."라는 블록체인의 약속 같은 것이 그런 것이다. 코인 열풍은 이러한 맥락에서 생겨났다.
그러나 그 결과는 어떠했는가?
우리 모두는 더 우울해졌다.
절대로 그 약속들은 공정하지 않았다.
더 큰 통제와, 그만큼 더 크게 통제력을 잃어가는 현실만이 거기에는 존재했다. 다들 허공에서 유령처럼 떠돌게만 되었다.
맛있는 것을 더 잘 먹고, 원하는 것을 얻도록 더 잘 기도하고, 섹시하고 현숙한 이성과 더 잘 사랑하려고 한 그 모든 일이 우리를 우울한 유령으로 만들었다.
더 단순히 말해, 우리는 모두 욕망과, 그 욕망을 이룰 수 있는 방법론이라는 규범에 패배한 것이다.
그리고 문명이 여전히 승리 중이다.
문명은 비약적으로 증가한 인류를 어떻게 통제할지 새롭게 감을 잡아가고 있는 것 같다.
자유, 자유, 자유, 더 많은 자유를 보장한다며, 인류를 더 확실하게 규범적으로 만들 수 있는 성공적인 방법론을 수립했다.
우리는 아주 확실하게 그 언어들에 의해 우울증으로 내몰린다.
이제는 이렇게 말해야 할 것이다.
'우울은 언어의 질환'이다.
그러나 사실적인 몸은 어떠한가.
몸은 언어로 작동하지 않는다. 몸은 통제와, 허구와, 문명의 소재가 아니다.
몸은 우리의 세계다. 그렇다고 메를로퐁티와 같은 이들은 말한다.
몸에 대한 태도가 곧 우리가 세계를 살아가는 태도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몸의 자율성을 신뢰하는가, 아니면 우리가 몸을 억압하는 것으로부터 벗어나 주체적으로 몸을 자유롭게 만들어야 한다는 언어를 통해 통제하고 있는가?
우울을 경험한다면 후자다.
과잉된 문명화가 우울을 낳는다면, 우리가 회복해야 할 것은 단순한 자율성이다.
당신이 삶에 대해 별 거 없고, 다 먹고 자고 싸는 과정이라고만 이해한다고 해보자.
그렇게만 이해하고 시작하는 것만으로 당신은 암스트롱의 달착륙보다 더 거대한 발걸음을 내딛은 것이다.
나아가 당신이 자연스러운 몸의 필요에 따라, 즉 몸이 시키는 바에 따라서만 먹게 될 때 얼마나 행복하게 먹는지, 자게 될 때 얼마나 행복하게 잠드는지, 싸게 될 때 얼마나 행복하게 싸는지를 실감하게 된다고도 해보자.
당신은 지금 기적적인 행복의 비밀을 알게 된 것이다.
당신은 아직 행복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자율적인 몸의 작용을 누리는 것만으로 이미 행복을 달성하고 있었다.
나머지는 덤이다. 해도 그만, 안해도 그만인 것들이다.
사실 당신은 이미 알고 있었다.
숙취의 고통에서만 해소되어도, 단지 그것만으로 모든 것이 충분하고 너무 행복하다고 이미 실감한 적이 있다.
오, 주여, 태어나서 감사합니다, 라고 두통과 구토감이 사라진 그 저녁에 소고기무국을 떠먹으며 당신은 할렐루야를 외친 날도 있었다.
중요한 것을 잊었다면, 생생했던 그 순간으로 다시 돌아가면 된다.
미로 안에서 통제력을 잃었다면, 헤매기 전의 그 갈림길로 돌아나오면 된다.
몸이 알아서 당신을 자율적으로 잘 이끌어줄 것이다.
몸이 스스로 잘 통제하며 스스로 잘 자유한다. 몸은 우리의 운명이자 동시에 자유다. 그것을 자율성이라고 부른다.
우울한 당신이라면 몸에게만 한번 다 맡겨봐라. 당신이 몸을 억지로 움직이게 하거나, 반대로 억지로 움직이지 않게 하지 말고, 몸이 당신을 통제하게, 그럼으로써 당신이 자유하게 만드는 현실을 다만 열어봐라.
먹고 자고 싸는 일부터 시작이다.
먹을 때는 먹는 일만 하고, 잘 때는 자는 일만 하며, 쌀 때는 싸는 일만 하는 그 지상에서의 일들이 하늘에서와 같이 이루어지리니, 오늘 당신이 그 몸과 같이 천국에 있을 것임이라.
그러다가 심심해지면 몸이라는 요람 위에서 이런 글이나 쓰며 마음 편하게 놀게 될 것이니, 나는 이를 다시 찾은 인간의 삶이라고 부르련다.
당신은 이러한 인간의 삶을 그 얼마나 좋아했던가. 실은 너무 좋아했기에 잃고 싶지 않아 통제하려고도 했던 것이다. 그 마음을 다시 기억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