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행을 하다 보면 손님과 대화를 하는 경우가 있다.
나는 먼저 말을 거는 타입이 아니고
다만, 손님이 말을 걸어오면 잘 들어준다.
혹은 운전에 집중해야 하므로 잘 듣는 척을 한다.
강동에서 강서까지, 꽤 먼 거리를 운행할 때였다.
보호자인 아내와 휠체어를 탄 남편, 50대 중반으로 보이는 부부였다.
남편은 거동이 불편했고 언어마저 부정확했다.
수시로 목소리를 높였지만 그게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면 그때마다 아내분이 '조용히 하라'고 나무랐다.
운전기사인 나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사뭇 거리낌이 없어서 무안하기도 했다.
대화(언쟁)의 내용은 주로 병원에 가지 않으려는 남편을 설득 내지, 꾸짖는 것이었다.
그런 남편에게 이번에 병원에 가지 않으면 보험금을 받을 수 없으니 참고 가라고 아내분은 목소리를 높였다.
보험금이 무려 '1억 원'이랬다.
집을 판 돈과 그 보험금을 합쳐 새집으로 이사도 가자고 했다.
순간 '보험사기?'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아내분이 문득 나의 존재를 알았다는 듯이 말을 걸어왔다.
남편이 희귀 불치병이란다.
소아마비 같은 증상이 성인이 된 후에 나타난다는 그 병 때문에 뇌까지 망가져가고 있단다.
젊어서 은행에서 근무했다는 남편은 정말 철부지 아이 같은 말투로 아내에게 투정을 부리고 있었다.
아내분이 나와 얘기를 시작하자 남편분이 소리를 질렀다.
그러면 아내분은 더 큰 목소리로 남편을 꾸짖는다.
그리고는 이내 목소리를 바꿔
"가끔 기싸움도 해야 돼요"라고 웃으며 내게 말했다.
'그럴 수도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치과에 가기 싫어하는 아이를 타이르기도 하고 혼도 내서라도 충치를 치료해야 하는 엄마처럼.
아내분은 남편이 소리를 지르면 더 큰소리로 맞받아쳤고
얌전하면 부드러운 목소리로 다정하게 대하셨다.
어느 동네를 지날 때, 예쁜 집이 보이면
"보험금 타면, 저런 집 사서 우리 신랑이랑 살았으면 좋을 텐데..."라며
혼잣말인 듯 남편 들으라는 듯 읊조리기도 했다.
거액의 '보험금'얘기가 나오면 기분이 조금 안 좋아졌지만 측은해지기도 했다.
1억 원은 내게 평생 만져 볼 수 없을 큰돈이다.
'내게 1억이 생긴다면...'이라는 부러움 섞인 상상이 시작된다.
증세가 성인 이 되어 나타나기 때문에 결혼할 당시, 전혀 몰랐다는 아내는 그런 사실을 숨긴 시댁을 무척 원망하기도 했다.
더 안타까운 사실은 그 병이 유전된다는 것이다.
여자에게는 거의 유전되지 않지만 남자에게는 거의 유전된다는데 부부에게는 두 아들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큰 아이에게서 조금씩 징후가 보이기 시작했다고.
남편에 이어 아들까지, 아내분이 겪었을 충격과 고통이 상상이 가질 않았다.
목적지에 가까워지는 동안 한참이나 내게 신세 한탄하던 아내분이 상점들의 간판을 읽기 시작했다.
눈에 보이는 다양한 상점들을 조용하게 읽어나가다가 갑자기
"칼국수 먹고 싶다, 손칼국수..."라고 푸념인 듯 바람인 듯 담담히 독백을 했다.
흘깃 보니 칼국수 집이 보였다.
서글프기도 하고, 체념인 듯싶기도 하고, 무슨 추억이 깃들어 있는 듯싶기도 했다.
아주 다정하고 순박하고 또 순수한 목소리와 느낌이었다.
그 순간 보험금 관련 얘기와 윽박지르는 모습으로 안 좋게 비쳤던 모습들은 모두 사라졌다.
섣불리 판단할 수도 없을뿐더러 또 그래서는 안 되는 그 아내분의 힘들었을 순간들이 그 자리를 어느새 차지하고 말았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건 아내분의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새어 나온 기도가 아닐까 한다.
보잘것없는 소원이지만 누군가에게는 기적이 될 수 있는 소원.
운전에 집중했다.
목적지인 병원에 무사히 도착해서 손님들을 내려드렸다.
병원까지 남편을 무사히 끌고 와서인지, 아니면 보험금 탈 생각 때문인지 아내분은 기분이 좋아 보였다.
인사를 드리고 차에 오르려니 아내분이 다가와 남편 모르게 살짝 말씀하셨다.
"아까 차에서 했던 얘기는 다 잊으세요. 그냥 해본 말이에요.
보험금 얘기도 남편 병원에 데리고 오려고 한 거짓말이에요....."
아...
다 잊을 수도 없는 얘기들이었고 '손 칼국수'는 더 또렷하게 느낌까지 살아있다.
보험은 보험이다.
남편을 병원까지 움직이게 하는 보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