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봄날은 간다]를 개봉관에서 본 2001년 이후 오늘 다시 보았다. '그 시절이 좋았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 시절 봄날'은 내 젊은 시절이기도 하면서 코로나가 발생하기 전의 시절이기도 했다.
"술 마시니까 멋있다."
아, 이 멘트는 은수의 멘트다. 서울에서 강릉까지 친구의 택시를 타고 온 술 취한 상우를 맞이한 은수가 하는 말이다. 술 마시니까 멋있다... 기시감이 이는 이 대사는 내 젊은 시절 그녀가 종종 던지던 말이었다. 그녀는 이 말 말고도 '당신을 존경해요'라고 여러 차례 말했다. 갓 사회로 돌아온 스물한 살의 내가 무엇을 존경받을까 알 수가 없었지만 나는 수긍했다.
그러고 보면, 술 마셔서 멋있었던 세상은 되게 오래 전인 것 같다. 주량이 자랑인 시절도 있었다. 그런 어마어마한 무식함의 발로는 '남자의 패기'였던가.
요즘에 와서, 그녀는 이틀에 한 번만 술을 먹기를 권장한다. 아마 자신이 내게 했던 '술 마시니까 멋있다'는 기억도 못하고 있을 테지.
이틀에 한 번, 같은 술을 마시는 것도 상당히 지겹다. 나는 보통 막걸리, 소주, 와인, 위스키, 맥주, 고량주를 번갈아 가면서 마신다. 코로나 이전처럼 만취할 때까지 마시는 게 아니라 그저 한두 병, 한두 잔을 마신다. 그런 다음 조용히 잠들고 새벽에 깨어나서 거실을 뒹굴면서 음악을 듣는다. 그러므로 아내는 더 이상, '술 마시니까 멋있다' 따위의 멘트를 할 수가 없을 것이다.
봤던 영화를 일부러 다시 보는 경우는 처음이다. [봄날은 간다]에 주인공으로 나오는 유지태라는 배우가 내가 제작하는 유명 브랜드의 홈쇼핑 홍보영상의 메인 모델인데 이 모델의 인터뷰 영상을 제작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 인터뷰 스크립트를 쓰면서 이 배우의 모든 인터뷰 영상을 찾아보긴 했지만 영화를 다시 보게 된 건 그 인터뷰 때문이 아니라, 유튜브에 누군가 [봄날은 간다]를 다시 봤는데 다른 느낌이 많아진다 해서였다. '다시 보면 달라진다'는 말이 쓱 내 맘에 들었다. 안방에 있는 그녀도 다시 쓱 눈여고 보고서는 이 영화를 다시 본 덕분에, '술 마시니까 멋있다'는 옛 기억도 떠올릴 수 있게 된 것 같다.
이 영화에는 명장면이 많다. 거의 모든 시퀀스가 명장면일지도 모른다. 감독도 물이 오르고 배우들도 물이 올랐다. 특히 은수는 굉장하다. 지금껏 단 한 번도 이 배우의 연기에 아무런 느낌이 없었는데... 이 영화를 다시 보고서는 상우가 영화의 말미에 다시 달라붙는 은수를 밀어내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할머니는 '떠나는 여자는 잡는 게 아니란다' 하시지만 이 대사는 영화의 구성을 투트랙으로 만드는 역할일 뿐이고, '돌아오는 여자는 받아들이는 게 아니란다' 까지는 연결되지 못한다.
"나를 사랑하기 시작한 여자는 싫어지기 마련이다."
젊은 날의 기억이 떠올랐고, 이영애 배우는 첫 입맞춤 장면에서 봉준호도 연출해내지 못할 기가 막힌 연기를 보여준다.
예외였던 여자, 그러니까 나를 사랑하지만 싫어지지 않은 여자.
그 여자는 과연 누구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