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간추려보면 내가 혹시 사고를 당한 것은 아닐까? 교통사고 같은 물리적 사고가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뇌를 다치는 사고는 일어날 수 있으니까.
내가 듣는 음악에 따라서 내가 쓰는 글이 달라진다. 특정 기억을 뇌에 담을 수 없도록 하는 음악을 들은 것일까? 아버지가 보내온 몇 장의 사진을 봤다. 초등학교 5학년 소풍 사진, 대학교 졸업앨범에 들어갈 사진을 찍기 위해 모였던 졸업동기들을 누군가 찍었던 사진. 나는 늘 찡그리고 있다. 근시였던 탓에 찡그린다. 지금은 찡그리지 않지만 근시가 해소되었어도 근시가 몸에 준 기억 탓에 대학시절까지도 나는 찡그렸다. 칠판이 보이지 않기 시작한 건 대략 초등학교 4학년쯤부터가 아닐까. 누나도 형도 안경을 쓰고 있었다. 그래서 안경을 쓰지 않는 나를 내 부모가 귀히 여기는 것으로 알았다. 나는 부모에게 실망을 주기 싫었다. 칠판이 보이지 않는 학교 외에는 불편한 것이 별로 없었다. 중학교, 고등학교로 진학하면서는 제법 불편해졌다. 고등학교 3학년에 드디어 근시가 해소되었다. 미련한 기억이다. 미련은 기억을 외면할까. 브루크너를 듣고 있으면 (오늘 교향곡 8번을 들었다.) 미련도 기억도 모두 찬란해진다. 기억도 가끔 지친다. 수희에 대한 내 기억은, 내 나이가 쉰이 넘으면서 브루크너의 종악장을 기대하듯 느긋해지면서도 들뜨게 된다. 마무리를 찾아 나서는 뇌세포들의 총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