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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목나무와 매미 Oct 22. 2023

상실과 함께 살아가기

<모호한 상실>(작가정신, 2023)을 읽고

 업무에서 오는 힘듦을 제외하고 인간으로 가장 견디기 힘들었을 때는 단연 2020년이었다. 코로나19의 창궐로, 중국에서 일하던 나는 한국에 있는 가족, 친구와 만날 수 없었다. 세상에 혼자 남겨진 느낌이었다. 집 밖으로의 출입도 힘들었고 좁은 방 안에만 박혀있자니 자연스레 우울감과 무기력함이 나를 덮쳤다. 나는 '모호한 상실'을 겪고 있었던 것이다.


  '모호한 상실'은 두 가지 경우의 상실을 의미한다. 첫째는 사랑하는 사람이 물리적으로는 부재하지만, 심리적으로 존재하는 경우다. 유괴되거나 실종된 아이, 군사 작전 중 사라진 군인, 이혼, 사망 등이 이에 해당한다. 둘째는 물리적으로 존재하지만 심리적으로 부재하는 경우다. 치매를 앓고 있는 가족, 만나서 스마트폰에만 빠져 있는 친구들, 워커홀릭인 배우자 등이 이런 상실을 경험하게 한다. '모호한 상실'은 다른 상실들과 다르다. "정상적인 슬픔은,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1917년 『애도와 멜랑꼴리』에 쓴 것처럼, 사랑하는 대상(사람)과의 관계를 정리하고 궁극적으로 새로운 관계에 몰입하는 것을 회복의 목표로 삼는다."(31쪽) 하지만 모호한 상실은 다른 상실처럼 관계를 확실히 정리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더 길고 깊은 아픔을 남긴다.

 ​<모호한 상실>(작가정신, 2023)은 이런 모호한 상실에서 오는 슬픔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설명한다. 저자가 그동안 만나 온 다양한 사람들을 바탕으로 모호한 상실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슬픔을 어떻게 조절해야 하는지를 안내한다.

 사회가 점점 고도화되고 다양화되면서 모호한 상실을 느끼는 사람들은 더 많아졌다. 이민, 유학, 이혼 등의 다양한 이유로 상실의 경험들이 나타난다. 저자에 따르면 이러한 상실에서 오는 우울을 최소화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대상의 존재와 부재를 모두 솔직하게 말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동시에 현재 자신의 상황을 인정하고 대상과의 관계를 조금씩 변화시켜야 한다. 이 과정을 통해 사람들은 상실을 안고 살아가면서도 자신을 놓지 않을 수 있다.


 우리는 영적으로, 또는 타인의 도움에 의지하여 이러한 상실에 대처할 수 있다. 종교에 기대거나 다른 사람과의 상담, 위로를 통해 슬픔을 조절하는 것이다. 상실 후 회복의 과정은 상실의 경험에서 나 자신을 돌보는 방법과 그에 따른 회복 탄력성도 기를 수 있다. 다만,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모호한 상실이 확실한 상실과 비슷한, 혹은 더 큰 슬픔을 준다는 사회적 합의가 있어야 한다. 엄기호가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에서 말했듯이 고통의 곁에 또 다른 사회적 안전망 또는 곁이 없다면, 그들은 이 고통과 상실에 의미를 부여할 수도, 고통을 긍정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2020년, 가족과 심리적으로는 연결되어 있지만 신체적으로 분리되어 있던 나는 출근하기 시작하면서 조금씩 슬픔을 관리하기 시작했다. 금요일 저녁에는 나만을 위한 작은 만찬을 준비했고 매일의 루틴도 만들었다. 새로 사귄 친구들 역시 우울함과 무기력함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그렇게 나는 새로운 사회관계를 통해 모호한 상실을 조금씩 이겨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어디론가 알 수 없는 깊은 바닷속으로 가라앉고 있었지만, 그 안에서 나를 받쳐주는 새로운 안전망을 찾아볼 수 있던 시간이었다. 모호했던 상실로 고통받았지만, 나만의 방법을 찾았고 한 뼘 성장할 수 있었다. 그때 이 책을 만났더라면 조금은 더 일찍 모호한 상실을 끌어안고, 조금 더 위에서 가라앉기를 끝낼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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