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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애많은김자까 Feb 21. 2020

이집트에서 1년> 이집트에서 검사를 만났다. 오검사

카이로에서 만난 사람들

드뎌 바빠 죽겠는 시간들이 끝나갑니다.

이젠 레귤러 방송 몇개와

독서, 본격적인 제글을 쓰려고 노력 중입니다.


뜸했던 시간들, '애많은김자까'나 '다산은죄다'...나

이런 검색어로 제 브런치를 찾아주시고,

졸고를 기다려주시는 몇몇 구독자님들이 떠올라 안부나 전해야겠단 마음으로,

치열했지만 따뜻했던 9년 전 경험과 착한사람들의 얘기를

'이집트살이 1년'을 이어 전하고자 합니다.

2011년. 무바라크 하야를 외치며, 들불같이 일어났던 이집트 아랍의 봄.

우리 일곱식구는(그땐 애넷이었습니다) 이집트에 있었습니다.

도착하자 마자, 타흐리르 광장의 시위가 시작됐고

우리 교민 외국인들 할 것 없이, 출애굽기의 현대판 엑소더스 행렬이 이어졌지만,

남편의 피디 저널리즘으로

우리 가족은 탈출하지 않고, 카이로에 남기로 했던 시간들은

이전 브런치에서 소개한 바 있습니다.


https://brunch.co.kr/@olee0907/80

https://brunch.co.kr/@olee0907/82

오늘은 카이로에서 만난 사람들, 그때도 지금도 제가 많이 사랑하는 사람들의 이야깁니다.


# 법무부댁 규땡이, 규땡이 남편 오검사


회사 연수프로그램에서,

그 많은 선진국 다 놔두고,

하필이면 이집트.

또 하필이면 2011년, 일촉즉발의 '아랍의 봄' 시절, 카이로로 떠난

이 무지막지하게 애만 많고, 무지막지하게 대책없고,

무지찬란한 애많은이피디&애많은김자까.

2010년 12월 16일, 생후 한달 된 넷째 포함 애넷과

출산한지 한달만에 붓기도 채 안빠진 애많은김자까와 그의 엄마이자

애많은이피디의 장모님 되시는 김여사까지.

총 일곱명이 흡사 난민의 모습으로 카이로 공항에 도착했다.


당시 우리는 존재와 등장만으로도

카이로 교민사회의 화젯거리였다.

(왜 아니겠는가?)

어딜가나 수군수군.


12월 16일에 카이로에 도착해, 사흘만에

집을 얻어 이사까지 마쳤고,

애들 학교를 보낼라니,

"어무나 크리스마스 휴가네? 1월 16일까지?"

그리하야, 의외로 빠른 이사로, 할일이 없어진 우리가족은

집구석에 칩거하다

크리마스마스 전야 미사에 가기로 했다.

이로써 그날 미사참석이

우리 집안의 공식적인 카이로 첫 집단 외출이 되었다.


미사는 그야말로 분심가득이었다.

영어로 미사를 집전하는 이집션 신부님이

시작하자마자

"레따쓰프레이" 라고 하는데, 대체 이게 무슨 뜻인가?

민족주의자인 애많은김자까는 영어 스피킹과 리스닝이 모두 쥐약이지만....

그래도 "레따스프레이"라~~

영어해독만도 분심가득인데,

여기저기 수군거리는 모양새가 영 거슬렸다.

우리가족이 카이로 성당에 등장했을 때,

50명 남짓 신자들의 어색한 눈인사와 목례 끝엔

그렇게 온통 수군거림의 입과 눈이 따라 다녔다.


"저집인가봐 저집. K방송국 피디네. 애가 넷이래 글쎄~~

넷째가 이제 한달됐단다. 용감도 하지. 장모님도 모시고 왔대"

"용감한 거니? 무식한 거지?"

 

뭐라곳?!!!!!


'애많은 집 처음 봐?'

하긴 갓난애까지 넷에, 장모님 조합이 카이로로 날라 온 집구석을

무슨 수로, 어디서, 봤겠나.

확실한 이방인이 된 우리는, 특히 나는 까칠한 방어태세에 돌입했다.

'누가 말만 시켜봐랏!!'

(사실 첫대면엔 늘 상당히 차가운 애많은김자까다)

미사보는 내내 여기저기서 수군거림과 속닥거림이 들렸다.

그때, 단발머리 네살짜리 딸아이를 둔, 한 여인이 다가와 인사를 했다.

어찌나 싹싹을 떨던지..


"안녕하세요오~~~. 얘기 많이 들었어요"

'난 들은 거 없다만'

"K방송국에서 연수오신 피디님 가족이라고요?"

'그런데?'

"저희는 법무부에서 연수 온 가족입니다"

'그래서?'


방어적 낯가림에 까칠하기까지 한 방송국댁과

싹싹한 법무부댁의 첫 대면이었다.

편의상 법무부댁은 규땡이라고 하겠다.

규땡이 남편은 오검사였다.

법무부에서 카이로로 연수를 왔다.

(몇주만에 두 집안은 아주 친해졌다.)


규땡이는 퍽 싹싹하고 바지런한 아이였다.

나와는 참......상태가 다른 아이였다.

훈육이고 뭐고

애들이 잘못했다 하면 막말부터 나가는 나와는 달리,

규땡이는 네살 딸아이(나중에 나의 대녀가 된)가 잘못을 하면,

일단 두손을 꼭잡고 눈을 맞춘 뒤, 조곤조곤 친절하게 막 얘기하는 그런 아이였다.

(아이라고 하기엔 그녀도 76년생이다. 그래도 내겐 아이나 다름없는 친한동생이기에)

그렇듯 규땡이는 친절하고 싹싹하고,

매사 똑부러지며,

똑똑한데다가

다만, 어울리지 않게도 맘은 약한 아이였다.


까칠하고 게으른 나에 비하면, 장점 투성이 규땡이었지만,

규땡이에게도 딱 두가지 단점이 있었으니,


첫째는, 요리를 못한다는 거고

둘째는, 그 요리를 먹으러 오라며 자꾸 초대를 한다는 것이었다.


그날도 역시,

"언니~~~~~~~~~모하세요?

왜?

"오늘 유학생 연수생들이랑 집에서 파티할 건데, 어머니랑 식구들 다 모시고 오세요~~"

음식은 배달시킬거니?

"아뇨? 제가 다 할건데요? 아유~~~언니도 참. 괜찮아요. 저 안힘들어요"

아니, 너 힘들까봐 그러는게 아니라, 내 입이 힘들까봐.

"네?"

아냐 됐어. 그런데 오늘 모임의 취지가 뭐니?

"오늘 오검사의 피아노 독주회가 있어요."

그럼 그렇지. 대한민국 검사들 참 팔자 좋다. 그래 금수저겠지. 피아노연주하는 검사라니...


여튼 모든 가족들을 이끌고,

저녁무렵 규땡이의 집으로 향했다.

아이들은 벌써부터 걱정이 한짐이었다.

규땡이모가 오늘도 요리해요?

안먹으면 안돼요?

콱!! 이모 성의를 그렇게 무시하면 안되는 거야.

라고 말하면서도...나 역시 진심 도시락 싸가고 싶었다.

난 규땡이모 음식은 어떻게든 먹겠는데, 자꾸 맛있냐고 물어보진 않았으면 좋겠어.


그렇게, 우리로 치자면

여의도에서 영등포 거리의

오검사, 규땡이네 집에 도착했다. 일곱이서 우루루

주방을 스캔해보니,

역시나, 똑같은 메뉴들..........

그나마, 잘씻은 채소에 마트에서 산 드레싱을 뿌려 놓은 샐러드가 그날도 제일 먹을만 했다.


먹는둥 마는둥하다.

피아노 연주횐지 독주회를 보기 위해, 착석했다. 규땡이도 내 옆에 앉았다.


띵...띵....

'조율하나보네.'

띵띵띵띵 띵띵띵. 띵띵띵띵 띵띵띵~~

멜로디뿐이었다.

반짝반짝 작은별 아름답게 비추네~~


저거 뭐니? 오검사 지금 뭐하는 거니?

연주요.

어디로봐서 저게 연주니?

저거 언니~~ 이집트 와서 두달동안 연습한 거에요. 오검사는 평생 피아노 쳐보는게 로망이었대요.

장난하니?

(급 소심해진 규땡이가) 사실 난, 언니한테 욕먹을 줄 알았는데, 꼭 연주회를 하고 싶다잖아.

그러니깐. 연주회를 한댔으면 연주를 해야지.

언니랑 형부한테 특히 꼭 들려주고 싶다고

왜? 오검 우리한테 억하심정있냐?


오검사의 로망인지 뭔지에

우리는 저녁 한때를 혹사당하고,

멜로디언 연주같은 피아노 독주회를 봐야만 했다.

연주가 끝났지만, 세상 생경한 풍경에

규땡이만 일어나서 기립박수를 쳤다.

난 그런 규땡이를 보고......혀를 찼다.


이렇게 말을 하지만, 이집트에서 수많은 추억 중 가장 소중한 기억은

규땡이와 오검사를 만난 일,

그리고, 몇몇 평생의 친구를 만난 일이었습니다.

'검사'라는 막연한 선입견을 깬 오검사.

규땡이는 현모양처로, 남편 말씀을 하늘같이 알고,  

남편이 눈에 힘만 줘도 똑똑 눈물을 흘리던 아이였습니다.

하지만, 오검사 말을 빌리자만,

이집트와서 몹쓸 동네언니(=나=애많은김자까) 만나서, 현모양처가 악처가 됐다고....

우리 규땡이의 인간개조 여권신장 프로젝트와,

웃겨죽는 오검사의 활약을 기대해주세요.


참!! 신부님의 '레따스프레이'는 'Let us pray', 기도합시다.........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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