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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애많은김자까 Sep 24. 2019

이집트에서 1년> 넷째 임신에, 이집트행을 결심하다.

애많은김자까 이집트에서의 1년(1)

넷째 임신 사실을 알고, 이집트행을 결심했다.


애많은이피디가

사내 해외연수를 신청해보겠다고 했다.


얼쑤우~~. 말로만 듣던 '뉴욕이나 런던에서 1년 살아보기'가 나에게도 실현되는 건가?


그러나, 그나 나나 연수는 간절히 원했으나,

어디까지나 동상이몽이었다.

애많은이피디는

몇편의 이슬람문화 다큐멘터리를 제작한 뒤,

중동국가로의 연수를 꿈꿨고.

나는 선진국이 아니면 안된다며, 방어선을 쳤다.

무슬림 국가에서 히잡을 쓰고, 일년을 살라고?!!!!!!!!

못해!!! 안해!!! 너(애많은이피디)나 해!!!!!!!


그러던 중, 넷째가 덜컹 들어서고.(임신하고)

육아를 전담해주셨던

울엄마 김여사에게 차마 입을 떼지 못했다가

임신 5개월째 이실직고 했을때,

아주 난리도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었다.

(에효~~ 그 사정은 아래 '다산은 죄다(1편)' 일부 참고)


https://brunch.co.kr/@olee0907/7


울엄마 김여사는 문을 걸어 잠근 채 곡끼를 끊길 2주.

애많은이피디는 장모 앞에 무릎을 꿇고 눈물로 용서를 빌고.

여하튼 파란만장 넷째 임신기였다.


처음 넷째 임신 사실을 알고,

이 모든 상황, '친정엄마의 불같은 노여움'을 예견한 애많은김자까는

선진국이고 뭐고, 가릴 처지가 아녔다.

일단, 어디든 연수가 결정되면

울엄마 김여사에게 임신 사실을 알리고,

"엄마 절대 애봐달라고 안할게. 애낳자마자 떠나서 일년동안 내가 애 키워 오고, 돌아오면 어린이집에 보낼게."

라는 말로, 울엄마의 노여움을 다소나마 누그러뜨릴 수 있지 않을까....했지만. 물론 씨도 안먹혔다.


남편은 이집트로 연수를 신청하겠다고 했다.

처음엔

"중동국가라도 선진국도 있는데, 굳이 이집트냐,

이 인간아~~

나도 뉴욕 런던은 못가더라도,

두바이 같은데서 좀 살아보자...이 인간아~~"


그러나, 남편이 하고 싶은 연수프로그램은

이집트의 AUC 대학에 있었고, 남편 왈

"이집트만큼 여자들이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중동국가가 없어. 히잡을 쓰지 않아도 되고"

모든 걸 고려한 선택지였고,

다른 나라에 비해 물가가 싸다는 것도 장점이었다.


남들은 단출하게 서너식구 움직이면 될 일이지만,

우린 무려 여섯이었다. (그땐 5호는 없었으므로)

정확히 말하자면, 여섯이 아닌 일곱이 떠나게 됐지만.


기어코인지 마침내인지 급기야인지....

남편은 사내 해외연수프로그램 대상자로 선정됐고,

우리의 이집트행은 그렇게 결정되고야 말았다.

 


그야말로 심난 그 자체였다.

애정을 갖고 론칭해 1년반 즐겁게 방송하던 '의학프로그램'을 내려놓고,

백수가 돼 훌쩍 떠나는 것도 내키지 않았고,

맙소사!! 중동아프리카 땅의 무슬림 국가 이집트라니~

아우우~~~~~~~

(나, 매주 미사 가야하는데, 성당은 있니?)


그리하야

2010년 11월 11일 넷째를 출산하고,

나는 출산 35일만에, 4호는 생후 35일만에

무려 21시간 비행 끝에, 이집트에 도착했다.

(서울에서 카이로 직항이 있었으나,

애많은이피디 김자까는 비용절감을 위해,

가장 싼 항로를 선택하는 바람에 21시간 비행 ㅠㅜ)

일년간 다녀오는 일정이라 컨테이너로

본격적으로 을 옮기기도 뭣하고,

(컨테이너 이사비용은 수천만원 ㅎㄷㄷ)

그럼에도 머릿수가 많다보니, 짐은 한짐...

이민가방 2개를 이피디김자까 둘이 나눠들고,

5학년 2학년 일곱살 1,2,3호를 비롯한 온 가족이

난민이 따로없을 지경으로 짐을

등에 매고, 이고지고, 들고

게다가 신생아까지.

우여곡절 끝에 카이로 공항에 도착하긴 했다.

하아~~~~~~

이 대책없는 애많은이피디 애많은김자까의

웃지도 울지도 못할 이집트에서의 1년이라니~ㅜㅜ

그 일년간의 기록을 쭈욱~~지켜봐 주십사~~


참고 1.

우리가 이집트에 도착한 건 2010년 12월 17일.

기억들 하시는지 모르겠지만,

2011년은 중동 아랍의 봄이 한창이었고.

그 중심에 이집트가 있었다.

철권통치 무바라크의 하야를 요구하며,

시위대는 격렬하고 치열하게 투쟁하고,

그에 맞선 군대는 탱크로 카이로 시내를 점령하고

일부 시위대는 폭군이 돼,

치안은 최악으로 치닫고

밤낮으로 총소리가 울리던 2011년  그 카이로에,

하필이면 내가 우리가 있었던 것이다.

후에 기록하겠지만,

당시 한국인을 비롯한 외국인 모두가 이집트에서 탈출했지만

그 엑소더스 행렬에 우린 합류하지 못했다.

애많은이피디&김자까 일곱가족은

한국으로의 마지막 전세기를 놓치고야 말았던 것이다.

(어떠한 피치못할 사정으로 ㅜㅜ...)


참고 2.

애많은이피디, 애많은김자까, 5학년 1호, 2학년 2호, 일곱살 3호, 생후 한달 4호. 이렇게 여섯이어야 했지만,

우린 일곱이었다.

1호가 게으른 어미를 대신해 4호 육아에 동원 될까봐, 그리고 비록 뱃속에 있을때 구박은 했을지언정,

귀한 넷째 외손녀를

못믿을 딸(년)에게 맡길 수 없었던

울엄마 김여사는 결심했다.

함께 이집트에 가기로...


생후 한달된 아기를 비롯해 애넷을 데리고, 게다가 장모님까지 대동한 채. 흡사 난민 모습으로 카이로에 도착한 애많은이피디와 애많은김자까는 이미 존재만으로도 카이로교민사회에선 화제며 경계의 대상이었다.



2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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