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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애많은김자까 Sep 27. 2019

이집트에서 1년> 우리는 탈출할 수 없었다.

애많은김자까 이집트에서의 1년(2)

바왑 마무드가 불을 끄고 커텐을 닫으라고 당부했다.

(바왑. 이집트에서 바왑은 한국의 경비원이라 할 수 있다.)

밖을 내다보지도 소리도 내지말라고.

마무드의 당부 중에도,

어두운 밖에선 간간히 총소리가 들렸다.

그렇다. 우린 탈출하지 못했다. 

2011년 1월 이집트 카이로에서.


우리 살았던 카이로의 빌라엔

모두 여섯가구의 외국인이 살고 있었고,

이미 대다수가 이집트를 떠난 상태였다.

옆집 앞집 뒷집 사정도 비슷했다.

동네 바왑들은 몇 안되는 거주민들을 위해

무장을 한답시고, 각자 각목을 어깨에 둘러매고 있었지만,

행진하는 수천 수만의 시위대를 

열댓명 바왑들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녔다.

간간히 들려오는 소문으로는,

시위대 중 일부가 폭도로 돌변해 약탈을 일삼는다고.

특히 외국인들이 타겟이라고.

실제로, 카이로 어느동네 외국인 누구누구가

목숨을 잃었다는 소문이,

흉흉하게 나돌고 있었다.


그렇게, 착한 이집션 마무드의 간곡한 당부가

있었음에도, 아이들과 엄마는 방안에 꽁꽁 숨겨두고,

정작 나는 거실로 나와 커텐 사이로 밖을 살피곤 했다.

'무바라크'의 하야를 외치며 행진하는

끊임없는 시위대의 행렬.

그들의 열망은 응원했지만,

그들비분강개함은

막히도록 공포스러웠다.


매일의 일상이 그랬다.

밤엔 숨어 있었고,

날이 밝으면 얼마 남지 않은 외국인들은 짐을 꾸려,

하나둘 이집트를 떠나고 있었다.

우리 정부도 전세기를 띄워, 교민들을 실어나르고 있었고.

애많은이피디와 애많은김자까도

그 즈음 깊은 고민을 하고 있었다.


무바라크의 하야를 요구하는

시민들의 시위는 날로 격화됐고, 

탱크가 점령한 카이로 시내는,

모든 가게, 모든 학교까지 죄다 문을 닫았다.

정상적인 일상이 어려워졌고

현실적으로 한국으로의 탈출을 고민해야 했지만,

여러모로 걸림돌이 많았다.

무엇보다 남편이 연수차 이집트에 온지, 고작 달째.

지금 떠나면, 기약할 수 없는 시간들이었고.

일곱명의 가족이 움직이는 비용문제는 

보다 현실적인 문제였다.

차라리 가까운 유럽으로 잠시 떠나있을까도 고민했지만,

자칫 사태가 장기화되면

우린 난민 아닌 난민이 될수 있었다.

(당시 유럽 왕복 비행기값은 30만원 정도였다.)


그런 고민을 하던 차에, 무바라크는 독재자 답게

돌연 인터넷을 모두 차단했다. 고립이었다.

(유혈진압의 시나리오였을수도)

그러나, 것은 성난 민심에 불을 지핀 격이 됐다.

일촉즉발의 상황으로 카이로 시내는 이내 마비돼 버렸다.

당장 쌀을 비롯한 식료품과 가스를 구할 수 없게 됐다.

남편은 먹고 살기 위해,

삼엄한 분위기를 뚫고, 바왑 마무드와 함께

몇시간을 달리고, 몇시간을 기다려,

가스 한통을 구해오곤 했다.


공포스러웠다.

모든 게 두려웠지만, 그래도 내가 누군가?

극성맞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애많은김자까가 아니겠는가?

결혼 당시, 주위서 내 허락도 없이 봤다는

우리의 궁합으로 말할 것 같으면.

이보다 좋을 순 없으나, 하나 문제라면!!

남편이 참자해도 옆에서 기름붓는 격이라나 뭐라나.

하긴 꺼진불도 다시보고

굳이 불씨를 되살려내는 애많은김자까였으므로.


"어이, 가보자"

"어딜?"

"타흐리르 광장"

"??"

"아랍의 봄이잖아. 그 역사적인 현장을 내 눈으로 확인해야겠어"

"위험하지 않을까? 나도 궁금하긴 한데, 어머님이 걱정하실텐데. 뭐라고 하고 나가?"


울엄마 김여사의 걱정은 물론 이만저만 아녔지만,

우린 결국 쌀을 구하러 간다는 명목으로 차를 몰고 나왔다.

(실제로 쌀이 똑 떨어지기도 했다.)

도로에는 탱크와 장갑차가 즐비했고,

카키색 군복을 입은 군인들이 점령하고 있었다.

전날 격렬했을 시위의 흔적이

도로 위에 고스란히 나뒹굴고 있었다.

긴장은 됐지만, 가슴은 벅찼다.

내가 중동 역사의 한가운데 서있는 거야!!


하지만, 호기로움도 잠시,

상황은 하루가 다르게 긴박해졌다.

떠나냐 남느냐 결정해야 할 때가 된것이다.

남편과 나는 마지막 전세기로 이집트를 떠나기로 했다.

엑소더스 행렬의 마지막 합류였다.

그러나............


비상상황이라도, 연수생 신분의 남편은

회사에 사전 귀국 보고를 해야 했다.

"한국으로 잠깐 들어갔다 와야겠습니다"

"그래, 상황이 많이 안좋더라. 무사한거지?"

"네. 귀국해서 인사드리겠습니다"

"어.............어.........근데 말이야. 문제가 말이야..."

"??뭐가요????"


요는 이랬다. 취재차 기자나 피디특파원이 이집트로 들어가야 하는데,

카이로행 하늘길은 죄다 끊긴 바람에,

취재진들이 카이로로 들어갈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들어온다 한들, 촬영을 도와줄 코디네이터를 찾을 수 없고.

카메라가 공항검색대에서 무사히 통과할지도 미지수였다.


당시, 이집트의 아랍의 봄 취재는,

물리적으로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위험도 무릅써야 했다.

남편은 일년간 연수생 신분이었기에,

취재의 의무도 없었고 회사에선 요구할 수도 없었지만.

애많은이피디의 피디 저널리즘

그즈음 발동해버리고야 만 것이다.

남편은 내게 물었다.

"우리 내일 비행기를 타야겠지?"

"그냥 남아 있자. 이집트에"

"아니, 그래도..."


선택지는

한국으로의 심란한 여정과

이집트에서의 불안한 체류, 둘 뿐이었다.

처음엔 아이들과 울엄마 김여사만이라도

한국행 비행기를 태울 요량이었다.

그러나 김여사는 완강했다.

우린 모두 남기로 했다.

우리가 타고 갔어야 할 마지막 한국행 비행기는 떠났고,

애많은이피디는

타흐리르 광장, 시위와 진압의 중심으로

그렇게 걸어들어갔다.


애많은김자까의 1년 이집트살이,

앞으로도 쭈욱 계속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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