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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애많은김자까 Oct 03. 2019

이집트에서 1년> 남편이 잡혀갔다

애많은김자까 이집트살이 1년 (3)


애많은김자까 애많은이피디는 2011년

회사연수 프로그램에 선정돼 이집트로 연수를 갔습니다.

아랍의봄 시위가 격렬했던 그때,

그땐 5호가 없던 때로,

생후 한달된 4호를 비롯한 다자녀 4남매와 친정엄마.

그리고 우리 부부. 일곱식구가 떠났던 이집트에서 1년.

그 치열했던 이집트살이 기록입니다 ^^


한국으로의 탈출을 포기하고

가장=애많은이피디의 피디저널리즘을

존중해주기로 결정한 지 며칠.

학교도 문을 닫아 아이들은 갈곳이 없었고,

교민들도 모두 떠나 말벗도 없이

종일 집에 숨다시피 갇혀있었다.


남편은 새벽같이 나갔다 밤이 되면 들어오기를 며칠.

그렇게 밤에 들어와선,

벅찬 아랍의 봄 현장, 타흐리르 광장의 함성을

이집션보다 흥분해서 내게 전하곤 했다.


시위는 보다 격렬해졌다.

반무바라크와 친무바라크가 겨루게 됐고.

외국언론에 호의적이었던 시위대들의 환호를 받으며,

그들의 무등을 탔던 남편은

다른 편엔 적대적 타깃이 됐다.


미국의 CBS여기자가 타흐리르 광장 한복판에서 집단성폭행을 당했던 것도 그 즈음이었다.

친무바라크계는 외국언론인들을 찾아내는데 혈안이 됐고,

카메라를 잘 숨겼더라도 타흐리르를 배회하는

동양인인 남편은 타깃이 될수 밖에 없었다.


다행히 며칠전 남편을 무등 태웠던

반무바라크계 시위대들이

애많은이피디를 에워싼 채로 타흐리르광장을 빠져나와

나일강까지 데려와서

남편을 배편으로 탈출시켰다. (슈크란 깃단=thank you, very much)


그날 그렇게 새벽에야 집에 돌아온 남편은


이제 타흐리르 광장은 갈 수 없을것 같아.

차라리 다행이었다.

잠시 눈을 붙인 남편은 외곽쪽에서 시민들을 만나겠노라며 다시 새벽길을 나섰다.


조심해.

응 걱정마


그날은 설날이었다. 음력설.

울엄마김여사는 어렵게 구한 가래떡을 불려,

취재나간 사위가 돌아오길 기다렸다.

함께 떡국을 먹겠다고.


그리고 오전 11시경

다급한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생각보다 일찍 돌아왔다는 반가운 마음에

현관문을 열고보니,

남편을 돕고있던 이집션 코디, 맘두만이 서있었다.

곧 울음이라도 터뜨릴 표정으로

두손을 맞잡은 채.


왜? 맘두? 미스터 리는?

마담...미스터 리....


그렇다. 남편이 잡혀갔다. 이집트 군인들에게.

그 즈음 파리에서 입국해 취재에 합류했던

선배 피디특파원도 잡혀갔다. 그는 경찰에게.


털썩 주저앉고 싶었지만, 그럴 때가 아니었다.

같이가. 맘두.

노 노 마담. 데인저러스.


맘두는 같이 움직이는 게 더 위험하다고 했다.

외국인이라 더 위험하고,

여자라 더 위험하다고 했다. 무슬림국가다.

아이들과 할머니를 지키고 있어라.

본인이 어떻게든 해보겠다고 했다.

친척 중에 군인이 있어 부탁해 놨다고.

그 친척과 함께 미스터 리를 찾아보겠다고.

얘기는 해얄 것 같아서 들렀다고 했다.


맘두를 따라가지 못하고 집에 남은 시간은

악몽과 같았다.

방 한구석에 쪼그려 앉아

다리 사이로 머리를 파묻고 있었다.

주방에선 끊임없이 칼과 도마가 부딪히는 소리만 들렸다.

울엄마김여사도 들었을 것이다. 사위가 잡혀갔단 얘기를.

딸보다 더 아끼는 사위, 이서방이....

초조한 마음을 칼질로 다스리던 김여사도

더이상 못견디겠는지,

소파에 앉아

묵주반지만 돌리고 있었다.

세아이들은 침묵했고, 생후 80일 갓난 4호만이 칭얼거렸다.

몹시 추웠다.

얼마나 지났을까...


먼저 풀려난 건 남편이었다.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았다.

남편은 내 어깨를 잡고,

괜찮아. 이집트 군인들은 신사적이야.

경찰에 잡혀간 선배가 걱정이라며,

다녀오겠다고 했다.

붙잡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렇게 몇시간 뒤.

선배피디도 풀려나 같이 집으로 돌아왔다.

촬영테잎을 다 뺏겨서 어쩌냐고,

그 와중에, 둘은 넋두리를 했다.


울엄마김여사는 말없이 육수를 내고,

파송송 다진마늘 넣고

계란을 풀어,

남편과 선배피디 앞에 떡국 한그릇 씩을 내놨다.

서울서 가져온 귀한 배추김치 한접시와 함께...


그리고 선배피디에게,

여기까지 와서 떡국 먹게 될 줄 몰랐죠?

고생했어요. 많이 들어요.


이서방도 많이 먹어.

두부라도 한모 넣어서 끓였어야 했는데....

다들 새해 복많이 받으시게...



2011년 초기 이집트 생활은

그렇게

위험한 순간들,

천우신조와 같은 모면들

우리 앞에 거듭되는 중이었다.


애많은김자까 이집트살이 1년은

앞으로도 쭈욱~~~계속됩니다만,

요즘 넘나 바쁜 ^^

기다리고 계시다는 응원 댓글에,

새벽에 깨어 잠시 끄적여봅니다.

아마도 오타가 엄청날듯. 이해해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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