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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애많은김자까 Jul 23. 2019

아빠는 58, 나는 48. 이제 우리 열살 차이


저는 어렸을 적 무척이나 병약한 아이었습니다. 픽픽 잘 쓰러지기도 하고, 사흘이 멀다 하고 엄마 등에 업혀 등교 하고, 덩치 큰 친구가 제 하굣길은 도맡다시피 했습니다.

크면서 조금씩 나아졌지만, 고등학교 때까지 늘 그렇게 약골이었던 저의 머리맡을 가족들이 밤새워 지키던 일이 다반사였습니다.

그러던 고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 때쯤이었나? 그때도 몹시 심한 몸살로, 끼니도 거른 채 저는 며칠을 앓아누웠습니다. 부모님 모두 직장에 가시고, 혼자 남아 앓고 있던 점심 무렵, 아빠가 집으로 쑤욱 들어오셨습니다. 백화점에서 호박죽한그릇을 사들고...그 점잖은 아빠가 대낮 백화점 지하 식품매장 쇼핑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는데 말이죠.

하지만, 원체 호박죽을 싫어하는 데다, 그때는 미음 한숟가락도 넘어가지 않을 정도로 열에 들떠 있었던 지라, 전 그런 아빠를 모질게 면박 줬습니다. 누가 이따위 죽을 먹겠다고 했냐며...

아빠는 점심시간 내내 제 머리맡에서, 글썽글썽 바라보다...“그래도 한입만 먹어보지. 먹어보지 하다...”점심시간을 꽉 채우고, 회사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때 즈음인 것 같습니다. 아빠는 위암 말기 판정을 받으셨고, 이후 10년간의 투병 끝에 저희 곁을 떠나셨습니다.

임종이 임박해 호스피스 병동에서 링거주사에 의존하며 힘겹게 하루하루를 버티고 계실 때, 아빠는 문득 ‘명동교자’ 만두가 먹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그길로 한달음에 달려가 만두를 사갔지만, 이미 아빠의 식도까지 꽉 차올랐던 암세포는 만두피 한조각도 넘기는 걸 허락지 않았습니다. 아빠는 그때, 넘어가지도 않는 만두를, “아빠 만두 사왔어. 한번만 먹어봐 한번만...” 울며 보채는 다큰 딸을 위해, 어떻게든 한입 베어 물어보려 하셨습니다.

그리고...사흘 뒤...아빠는 그렇게 영영 우리 가족과의 짧은 소풍을 끝내고, 하늘나라로 긴 소풍을 떠나셨습니다.      


저는 지금도 호박죽은 먹지 않습니다. 당신 몸 속 가득 퍼진 암세포의 존재도 모른 채, 감기몸살 난 딸을 위해 겸연쩍음도 잊고 사들고 왔던 아빠의 그 죽도 먹지 않았던 제가, 무슨 염치로 이제와 죽을 먹을 수 있겠습니까?


아빠 나이 쉰 여덟. 내 나이 스물 여섯에 아빠는 하늘로 돌아갔습니다.

문득 떠올려보니, 아빠는 지금 내 나이 마흔여덟에 위암 선고를 받았습니다. 오열하는 가족들 앞에서, 꾹꾹 눈물을 참았던 아빠는 다음날 엄마와 새벽 미사를 보고 오는 길에 길거리에 주저앉아 아이처럼 울었다고 합니다.

“우리 딸 결혼할 때, 손도 잡아줘야 하고. 우리 딸 하고 싶다는 꿈도 이뤄줘야 하는데....”


그때의 나의 꿈이 무엇이었는지 기억 속에 또렷하지 않지만, 난 아마도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을테고, 난 아빠. 글을 쓰고 있어.     

아빠는 쉰여덟. 나는 마흔여덟. 이제 우린 열 살 차이.

많이 늦지 않게 갈게.

아빠보다 늙은 딸로 가도 못 알아보면 안돼. 아빠. 잊지마. 아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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