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울 땐 독서
제임스 설터의 책은 처음이다.
책 말미 ‘나가며’에서 소설가 존 케이시는, 설터의 책을 읽은 적이 없는 사람은 첫 번째 강연인 「소설의 기술 The Art of Fiction」을 읽어야 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나는 제대로 출발을 한 셈이다.
설터는 웨스트포인트 사관학교 졸업 후 전투기 조종사로 수많은 전투에 참여한 경력이 있고, 한국 전쟁 참전 경험을 쓴 『사냥꾼들』(1956)을 출간하면서 전역하고 전업 작가로 데뷔했다. 글을 쓰기 위해서 전역을 했다고 하니 글쓰기에 대한 그의 열정이 어느 정도였는지 알 수 있다.
이 책의 원제는 The Art of Fiction으로 ‘소설의 기술’이다. 우리말 번역은 『소설을 쓰고 싶다면』이다. 서술형의 제목이 독자들을 좀 더 유혹하는 듯하다. 괜찮은 의역이다. 왜냐하면 설터는 소설의 기술을 말하기보다는, 글을 쓰고 싶은 독자들의 ‘욕망’을 주로 부추겼기 때문이다.
이 책은 설터가 2014년 버지니아 대학에서 한 강연과 1993년 ‘파리 리뷰’ 인터뷰 내용을 편집한 것이다.
첫 장에서 설터는 책의 힘에 대해 말한다.
책을 읽는 동안 눈에 보이거나 귀에 들리는 건 아무것도 없지만 우리는 보고 듣고 있다고 믿습니다. 나는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연인』을 읽고 있었을 때 내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 있다고 믿었지요. 나는 나무들이 줄지어 늘어선 대로를 보았고, 흰옷 입은 사람들과 중국인 거리를 보았습니다.(11쪽)
책을 읽는 동안, 독자가 책이 이끄는 세계에 완전히 동화되어 그 자신이 그 세계에 있다고 믿는 경지에 이르게 되면, 작가와 독자가 합일되는 환상적인 경험을 하게 된다. 그런 경험이야말로 책이 가진 묘한 매력이다. 그런 매력 때문에 작가는 글을 쓰고, 독자는 글을 읽지 않을까.
설터는 책에서 그런 경험을 하게 하는 작품들을 소개했다.
프랑수아 모리아크가 발자크의 『고리오 영감』의 예를 들었다.
폴 부르제라는 열다섯 살 소년이 『고리오 영감』을 1시에서 읽기 시작해서 7시까지 읽고는 책 읽기가 주는 환각이 너무 강렬해서 비틀거렸다. 발자크에게 떠밀려 들어간 강렬한 꿈이 술이나 아편과도 비슷한 영향을 미쳤다고 했다.
설터는 독서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이렇게 밝혔다.
나는 즐거움을 위해 책을 읽습니다. 난 이제 더 이상 의무감으로 책을 읽지 않아요. 뭔가를 읽어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끼지도 않고요. 그렇기는 하지만 내가 죽기 전에 읽고 싶은 몇몇 책들이 있답니다. 무엇 때문인지 그 이유를 말하긴 어렵군요. 읽지 않고 떠난다면 뭔가 찜찜한 기분이 들 것 같아요(...) 나는 생이 끝나갈 시점에 책을 읽고 있는 나 자신을 생각하곤 한답니다. 에드먼드 윌슨이 생의 마지막 나날에 침대 발치에 산소 탱크를 둔 채 히브리어를 공부했던 것처럼 말입니다.(15쪽)
독서에 대한 설터의 열정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말이다. 사실 설터의 강연은 이런 ‘열정의 감염’을 일으키는 데 있는 것 같았다. 책을 읽으면서 책의 세계에 빠지는 일이 자주 일어난다면, 어느 날 독자는 그 스스로 책의 세계를 건설하고자 하는 욕망이 일어난다. 그런 욕망의 부추김으로 독자는 작가의 세계로 넘어가게 된다. 단, 쓰기 위해서는 많이 읽어야 한다고 한다.
지난 수십 년 동안 나는 책을 읽지 않거나 읽어본 적이 거의 없는 사람과 오랫동안 정말 친하게 지내거나 편안한 관계를 맺은 적이 없습니다. 나에게는 독서가 필수적인 것입니다. 책을 읽지 않는 사람들에게선 뭔가 빠진 게 있지요. 언급하는 말의 폭, 역사 감각, 공감 능력 같은 게 부족해요. 책은 패스워드지요.(16쪽)
설터는 작품에서 독자가 몇 줄 또는 한 페이지의 일부만 읽고 나서 작가가 누구인지 알아차릴 수 있다면, 그 작가는 문체를 지니고 있다고 했다. 그는 ‘문체’라는 말에 저항감을 느낀다고 하면서 ‘목소리’라는 말을 선호한다고 했다.
문체는 선택적인 것이고 목소리는 거의 유전적인 것, 전적으로 독특한 것이지요. 다른 어떤 작가의 글도 이사크 디네센처럼 들리지 않습니다. 그 누구의 글도 레이먼드 카버나 포크너처럼 들리지 않습니다. 그들은 끊임없이 고쳐 씁니다. 바벨, 플로베르, 톨스토이, 버지니아 울프 같은 작가들 말입니다. 그들에게 작가가 된다는 것은 고쳐 써야 하는 형벌을 받은 것을 의미합니다. 그들이 쓰려고 했던 것은 그게 아니니까 말이에요. 혹은 쓰려고 했던 게 잘못 생각한 것이었으니까요. 또는 고치면 더 좋아질 수 있을 테니까요. 너무 길거나 단조롭거나 요점을 벗어났거나 좀 엉성한 것 같아 보이니까 말이에요. 그렇지만 그 작품은 언제나 그들이 한 말처럼 들립니다. 그것이 그들의 문체입니다. 그들의 목소리인 것입니다.(31쪽)
그는 작가는 형벌을 받은 존재라고까지 한다. 그만큼 글 쓰는 것이 어렵다는 뜻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들이 글을 쓰는 이유는 글이 주는 매력, 혹은 마력에서 벗어나지 못해서가 아닐까.
‘장편소설 쓰기’에서, 그는 플롯은 이야기 이상의 것이고, 거기에는 인과관계적인 요소와 놀라움의 요소가 담겨 있다고 했다. 그는 소설 쓰는 법을 가르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글 쓰는 삶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아주 많은 시간을 글쓰기에 사용해야 하고, 생활 대신 글쓰기를 해야 합니다. 뭔가를 얻어내려면 아주 많은 것을 글쓰기에 바쳐야 해요. 그렇게 얻어내는 것은 아주 소소한 것일 뿐입니다. 하지만 그건 의미 있는 거죠. 세상에 확립된 가치가 있는 건 아닙니다. 여러분은 많은 것을 바쳤지만 얻은 것은 별것 없습니다. 거의 아무 대가 없이 그 모든 것을 한 것입니다.(44쪽)
이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글을 왜 쓰는가? 에 대한 그의 생각은 아래와 같았다.
음, 즐거움을 위해서일 수 있겠지요. 한데 즐거운 것은 분명하지만 아주 큰 즐거움은 아니랍니다. 그렇다면 남을 즐겁게 해 주기 위해서일 수 있겠죠. 나는 때때로 어떤 사람을 생각하며 그런 마음으로 글을 쓰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남들에게 존경받기 위해, 사랑받기 위해, 칭찬받기 위해, 널리 알려지기 위해 글을 썼다고 말하는 것이 더 진실할 것입니다. 결국은 그게 유일한 이유입니다. 결과는 그것과 거의 상관없습니다. 그 이유 중 어느 것도 강한 욕망을 불어넣지는 못합니다.(45쪽)
그가 글을 쓰는 이유는, 사람의 본능 중 하나인 ‘인정의 욕구’때문이라는 것을 아주 솔직하게 밝히고 있다. 사실 모든 작가들도 그렇지 않을까. 비록 각각 글 쓰는 이유를 다르게 표현했을지라도 말이다.
설터는 이 책에서 여러 작가들과 작품들을 예로 들었다. 그가 진짜로 말하고 싶었던 것은, 소설을 쓰기 위한 어떤 ‘기술’이나 ‘기교’가 아니라, 책이 가지는 힘과 그 힘을 가지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의 실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글로 쓴 것들은 우리와 함께 늙어가지 않습니다. 적어도 내 경우는 그런 것 같아요. 그것들에도 시간의 흔적이 어리는 것 같긴 해요. 하지만 시간의 흐름에 따라 최신 상태가 되는 것과 같은 일은 없지요. 그것들은 시간 바깥으로 나가서 존재하거나 아니면 소멸됩니다. 문학은 이런 식으로 진행됩니다. 작품은 시대와 장소를 드러내 보여준 다음, 점차 그 시대와 장소가 됩니다.(75쪽)
설터는 그의 작품 『올 댓 이즈』의 제사題詞를 이렇게 썼다. 글에 대한 그의 생각이 잘 드러나 있는 듯해서 옮겨 본다.
모든 건 꿈일 뿐, 글로 기록된 것만이 진짜일 거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리고 마지막에 실린 것은 <파리 리뷰> 인터뷰인데, 에드워드 허시와의 대담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인터뷰에서 글쓰기에 대한 설터의 솔직한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 그 내용을 일일이 다 쓸 필요는 없어서 생략했지만, 설터의 개인적인 면모를 자세히 알 수 있어서 흥미로웠다. 설터에게 관심 있는 독자라면 일독을 권하겠다.
여태까지 제임스 설터라는 작가에 대해서 알아봤으니, 이제 그의 소설을 읽어볼 일만 남았다. 그의 산문은 비교적 깔끔하고 군더더기가 없었다. 아마 그의 소설도 그러하리라. 기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