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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 오리 Dec 26. 2021

개심의 시간, 혹은 괘씸의 시간

  -마음의 고샅길



 영하 14도.

이번 겨울 중 가장 추운 날씨다. 이런 때는 마음이라도 따듯하게 하면 좋겠다. 마음을 따듯하게 하는 방법 중 하나는 좋은 시를 읽는 것이다. 예전에 읽어보았던 시 중에서 하나를 골랐다.




 안현미 시인의 <배롱나무의 안쪽>이라는 시다.  

 시를 소리 내어 읽어 보았다. 예전에도 읽은 시인데 이번에 다시 읽어보니, 읽을수록 마음이 뜨거워졌다. 새삼스럽게 이 시가 왜 마음을 붙잡을까? 현재의 내 마음을 건드리는 그 무언가가 있나 보다.

 시 전문을 옮겨 본다.




                             배롱나무의 안쪽

     

                                                                     안현미

                                                                                                                          



 마음을 고쳐먹을 요량으로 찾아갔던가, 개심사, 고쳐먹을 마음을 내 눈앞에 가져와보라고 배롱나무는 일갈했던가, 개심사, 주저앉아 버린 마음을 끝끝내 주섬주섬 챙겨서 돌아와야 했던가, 하여 벌벌벌 떨면서도 돌아와 약탕기를 씻었던가, 위독은 위독일 뿐 죽음은 아니기에 배롱나무 가지를 달여 삶 쪽으로 뻗쳤던가, 개심사, 하여 삶은 차도를 보였던가, 바야흐로  만화방창(萬化方暢)을 지나 천우사화(天雨四花)로 열리고 싶은 마음이여, 개심사, 얼어붙은 강을, 마음을 기어이 부여잡고 안쪽에서부터 부풀어 오르는 만삭의




 시인은 답답한 마음으로 개심사에 갔다가 거기서 배롱나무를 보았던 모양이다. ‘얼어붙은 강’으로 봐서 계절은 겨울인 듯. ‘안쪽에서부터 부풀어 오르는 만삭의’라는 표현은, 나무에게서 어떤 희망을 읽어내는 시인의 마음이 드러나는 듯했다. ‘고쳐먹을 마음을 내 눈앞에 가져와보라’는 문구는 옛 고승의 일갈을 떠올리게 한다. 마음이 괴롭다고 하니 그 괴로운 마음을 꺼내보라고 다그친 고승의 말씀 말이다.


 그동안 좋은 시를 만나고도 그 시를 가슴속에 넣고 천천히 음미하고 되새김질하는 시간을 갖지 못했다.

언제까지 허둥대기만 하는 삶을 살 것인가. 허둥거림 속에는 아무것도 없었고, 공허함만이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공허함은 곧잘 이유 없는 우울함으로 이어진 나날이었다.


 갈피를 잡지 못하는 있는 요즘 내 마음이, 왠지 시인의 마음과 살짝 겹쳐지는 듯했다. 그래서 이 시에 자꾸 마음이 갔나 보다.

 그동안 무엇에 집착해서 마음이 그렇게 들떠 있었을까. 비교와 부러움을 불러일으키는 세상사에 대해, 이제 그만 무심해지고 싶다.

 고쳐먹을 마음, 그 마음은 도대체 어디에서 비롯되었겠는가.

 바야흐로 ‘개심의 시간’을 가져야 할 때다. 그렇지 않으면 ‘괘씸한 인생’이 되어버릴지도 모르기에.




 아파트 근처 산책로 주변에 배롱나무들이 줄지어 서있다. 한겨울의 강추위에, 성하(盛夏)의 푸르고 무성하던 잎들을 다 떨어트려 버리고 알몸으로 서있다.


 나무는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버릴 땐 완전히 버려야 한다. 완전히 버려야 새로운 것을 얻을 수 있다.’


 오늘 같은 강추위에도 배롱나무들은 아주 당당해 보인다.

그 이유는 저 빈 몸들 속 어딘가에 수 천 수 만 개의 뜨거운 불을 품고 있어서가 아닐까.

 저 알몸들이 눈부시게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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