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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 오리 Apr 04. 2022

내 멋대로 시 읽어보기 4

- 마음의 고샅길

 바람 부는 날, 나무 사이로 걸어갈 때가 있다. 바람은 나무의 풍성한 잎사귀를 이리저리 쓰다듬으며 잎사귀에 뭔가를 속삭이고 있는 것 같다. 바람과 잎사귀가 정담을 나누는 것을 볼 때 문득 생각나는 시가 있다. 

조원의 <두 개의 입술>이라는 시다. 





      두 개의 입술


                                조원



바람이 나무에게 말하고 싶을 때

나무가 바람에게 말하고 싶을 때

서로의 입술을 포갠다

바람은 푸르고 멍든 잎사귀에 혀를 들이 밀고

침 발라 새긴 말들을 핥아준다

때로는 울음도 문장이다

바람의 눈물을 받아 적느라

나무는 가지를 뻗어 하늘 맨 첫 장부터

마침표까지 숨죽여 찍는다

말귀를 알아듣는다는 건

상대의 혀를 움직여주는 것

소통은 바람과 나무가 

한결 후련해지는 것!




 '소통은 바람과 나무가 한결 후련해지는 것'! 

멋진 말이다. 늘 나무 사이로 걸어 다녔고 바람이 나뭇가지를 흔들어놓는 것을 수도 없이 보았다. 그렇지만 바람과 나무가 입술을 포갠다는 표현은 생각해보지도 못했다. 역시 시인의 감수성은 남다르다. 이런 뛰어난 시를 보면 기가 죽는다. 그렇지만 이런 시를 쓰기 위해서 시인은 얼마나 많은 불면의 밤을 보냈는지 모를 일이다. 그 결과만을 보고 부러워하는 나는, 아주 개념 없는 인간이다. 시 한 편을 위해 나의 전 생애를 걸어본 적도 없으면서 말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이런 좋은 시를 자주 읽으며  감수성을 조금씩 키워나가는 수밖에. (재능 없음을 한탄하지 말고 나의 대책 없는 게으름을 한탄하자.)

 나무는 움직이지 못하는 존재이고, 바람은 머무르지 못하는 존재이다. 이런 상반된 존재들이 소통을 하다니! 놀라운 일이다. 나무와 바람이 소통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바람과 나무는 서로 다른 존재이면서 사랑을 한다. 서로의 입술을 포개면서.

 바람은 온몸으로, '푸르고 멍든 잎사귀'를 애무해준다. 푸른 잎사귀를 멍든 것으로 보는 시인의 눈은 얼마나 섬세한 눈인가. 나무의 푸른 상처는 바람의 애무로 치유될 것 같다. 나무는 바람의 눈물을 받아 적느라 가지를 뻗어서 마침표까지 찍는다. 

 바람은 왜 눈물이 많을까. 세상을 돌아다니며 가슴 아픈 일을 많이 보았기 때문이겠지. 그런 바람의 말을 한마디도 놓치지 않고 들어주는 나무의 아름다운 마음은 바람을 치유해줄 것이다. 바람과 나무는 서로 위로해주고 서로 쓰다듬어주며 오늘 하루를 보내고, 내일, 모레, 그다음에 이어지는 수많은 나날들을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상대의 혀를 움직여준다는 건 완벽한 소통을 하고 있다는 뜻. 그래서 바람과 나무는 한결 후련해지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진짜 소통이다. 

우리는 그런 후련해지는 소통을 언제 해보았던가?

어쩌면 나무와 바람을 소통시키는 것은 시인이 아닐까. 그리고 시인이 쓴 시는 각자 혼자인 우리를 소통시키고 있는 것이겠지. 바람과 나무는 각각 다른 입술을 가졌다. 그렇지만 그 두 개의 입술은 겹쳐지고 상대의 혀를 움직여준다. 둘이면서 하나가 되는 멋진 순간이 온다. 

사랑, 그것의 다른 이름은 소통이다.


 



© fhfpix, 출처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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