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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 오리 Apr 21. 2023

인생의 허무를 어떻게 할 것인가/김영민/사회평론

  -외로울 땐 독서



프롤로그에서 저자는 이렇게 말했다.


 인생은 허무하다. 허무는 인간 영혼의 피 냄새 같은 것이어서, 영혼이 있는 한 허무는 아무리 씻어도 완전히 지워지지 않는다. 인간이 영혼을 잃지 않고 살아갈 수 있듯이, 인간은 인생의 허무와 더불어 살아갈 수 있다. 


어떻게 인생의 허무와 더불어 살아갈 수 있을까? 

무척 궁금하다. 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서는 책을 끝까지 읽어보는 수밖에 없겠다. 

 저자는 송나라 때 문인인 소식의 「적벽부(赤壁賦)」 이야기를 한다. 그는 소식이 「적벽부」 서두에서 인생의 허무라는 문제를 제기하고, 이어서 그에 대한 다양한 해답들을 검토하고, 마침내 자기만의 결론을 내리면서 마무리했다고 한다. 


 부록으로 실은 「적벽부」는 다름 아닌 이 산문집의 여정을 담고 있다. 이런 여정을 통해, 나는 이 책이 허무와 직면한 내 생각의 기록인 동시에 「적벽부」에 대한 유연한 주석이 되기를 희망한다.



 인간인 이상 살아가면서 허무를 느끼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역설적으로 인간이기 때문에 허무를 느끼고 사는 것인지 모른다. 동물에게는 허무하다는 의식 자체가 없을 것 같다. 그렇다면 허무를 어떻게 관리하며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고 살아야 할 지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 그것에 대한 힌트를 이 책은 제공해주지 않을까 싶다.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우리는 허무를 느낀다. 어쩌면 존재하는 시간 때문에 허무를 느끼게 된다. 그러므로 시간을 어떻게 견디어낼 것인가가 화두가 될 것 같다.


 한 해가 저물어가면 나는 고생대에 번성하다가 지금은 멸종한 삼엽충이나 암모나이트를 생각하며 글을 쓴다. 장차 멸종할 존재로서 이미 멸종한 존재들을 떠올리며 그들과 상상의 공동체를 이룬다. 그것이 시간을 견디는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이기 때문에. (29쪽)


 -현재의 허무감에 발버둥 쳐보지만 이런 허무감이 나만의 것은 아니라는 생각, 즉 아주 오래전 고생대의 멸종해 버린 삼엽충과 암모나이트와 별로 다를 바 없이 멸종할 존재라는 것에 강렬한 공동체 의식을 느낀다는 저자의 생각에, 나 또한 깊이 공감하며 묘한 안도감을 느꼈다. 허무감이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모든 존재들의 것이라는 일종의 동류의식에 기대어.


 그래도 살아있는 동안은 즐겁게 사는 것이 좋지 않을까. 그러기 위해서는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사는 것이 좋겠다.

저자는 그 대상에 파묻히지도 말고 피하지도 말라고 한다.


 인생을 즐기고 싶은가. 그렇다면 좋아하는 대상을 피하지 말아야 한다. 환멸을 피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좋아하는 대상에 파묻히지 말아야 한다. 대상을 좋아하되 파묻히지 않으려면, 마음의 중심이 필요하다. 그리고 마음의 중심은 경직되어서는 안 된다. 경직되지 않아야 기꺼이 좋아하는 대상을 받아들이고, 또 그 대상에게 집착하지 않을 수 있다. (272~274쪽)



 -살아있는 동안은 늘 흔들리고 있다. 그 흔들림은 결국 중심을 잡기 위한 몸부림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흔들리지 않고 고정되어 있다는 것은, 어느 한쪽으로 치우쳐 있을 때일 가능성이 높을 때가 아닐까. 적어도 완벽하지 못한 나 같은 인간에게는 말이다.



 불확실성으로 가득한 이 삶에서 그래도 확실한 것이 하나 있다. 좋건 싫건 이 삶이 언젠가는 끝난다는 것이다(...)
 죽음은 어쩔 수 없지만, 죽음에 대한 태도는 어쩔 수 있다. 죽음이야 신의 소관이겠지만, 죽음에 대한 입장만큼은 인간의 소관이다. 즐거운 인생을 사는 이에게야 죽음은 더없이 안타까운 일이겠지만, 고단한 인생을 사는 이에게는 죽음이 반가운 소식일 수도 있다. (62~63쪽)


 -절대적인 시간은 영원한 것이겠지만, 필멸자인 인간에게 시간은 유한한 것이다. 그런 시간의 유한성이 어쩌면 인간에게 어떤 의미에서는 위로가 될 수 있다.

 유한한 삶이 주어진 인간에게 죽음은 확실한 것이다. 죽음은 우리 마음대로 할 수는 없지만, 죽음에 대한 자신의 입장은 정할 수 있다. 이것만으로도 적지 않은 위안이 된다.




 저자는 에필로그에서 산책을 몹시 좋아한다고 했다. 그 이유는 이렇다.


 내가 산책을 사랑하는 가장 큰 이유는 산책에 목적이 없다는 데 있다. 나는 오랫동안 목적 없는 삶을 원해왔다. 왜냐하면 나는 목적보다는 삶을 원하므로. 목적을 위해 삶을 희생하기 싫으므로. 목적은 결국 삶을 배신하기 마련이므로. 목적이 달성되었다고 해보자. 대개 기대만큼 기쁘지 않다. 허무가 엄습한다. (287~288쪽)


 -목적 없음의 목적인 삶이다. 삶 자체를 살기 위해서는 그냥 ‘지금, 여기의 순간’을 사는 것이라는 것. 그것을 자연스럽게 이루는 때가 바로 산책하는 시간일 수 있겠다.



 사람마다 다양한 재능이 있다. 혹자는 살아남는 데 일가견이 있고, 혹자는 사는 척하는 데 일가견이 있고, 혹자는 사는 데 일가견이 있다. 잘 사는 사람은 허무를 다스리며 산책하는 사람이 아닐까. 그런 삶을 원한다. 산책보다 더 나은 게 있는 삶은 사양하겠다. 산책은 다름 아닌 존재의 휴가이니까. (293쪽)


 -나는 어디에 속하는 사람인지 잘 모르겠다. 아직도 중심을 잡지 못하고 사는 인간이므로. 그렇지만 목적 없는 삶을 지향하고 싶다. 내게도 존재의 휴식이 필요하므로.



*사족

 이 책을 읽는 동안은 거짓말처럼 전혀 허무하지 않았다. 책을 통해서 이런 마법 같은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는 것. 그리고 세상에서 즐거움을 포획할 수 있는 대상이 아직 남아있다는 것.

 이런 사실만으로도 당분간 살아갈 힘을 얻은 것만 같다. 그 힘이 비록 영속적인 것이 아닐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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