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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올리브많이 Jun 11. 2020

호르몬의 노예로 산다는 것

한 달의 반, 일년의 반, 호르몬 영향권

나에게도 부캐(부 캐릭터)가 있다면? 아마 '호르몬 노예' 일거다. 한 달에 한 번, 여자라면 다 하는 대자연이 뭐 그리 대단한 일이냐고 하신다면 할 말은 없습니다만, 그 평범하고 루틴한 몸의 변화가 내 삶에 가져오는 영향력에 새삼 놀랄 때가 많다. 한 달에 약 1주일만 생리를 한다고 쳤을 때, 그 영향이 딱 1주일이라고 생각하면 크나 큰 오산이다. 실제로는 그 앞의 배란기, 생리 직전 기간까지 무려 한 달의 절반 가량이 호르몬 영향권이다.


한 달의 반, 일 년의 반
그 긴 기간 동안 나는 호르몬의 노예로 산다.


생리 10일 전, 노예의 길이 열린다. 이때는 가볍게 소화가 잘 안 되는 느낌이 들거나 약간의 변비가 시작된다. 그리고 생리 당일이 닥쳐오기 전까지 계속해서, 꾸준하게, 지치지도 않고 몸이 붓는다. 5일 전까지 도래하면 아랫배, 가슴, 다리가 아주 땡땡 부어 몸 전체가 묵직한 기분이다. 다이어트를 한다고 아무리 호들갑을 떨어봤자 이 시기에는 아무 소용이 없다. 없는 수준이 아니라 오히려 악화된다. 거의 굶다시피 하고 숨만 쉬어도 이 기간에는 체중이 증가한다. 이후엔 엄청난 식. 욕. 폭. 발. 이 따라온다. 여기서 말하는 호르몬 식욕이란, 배가 고파서 뭔가가 먹고 싶은 게 아니라, 배도 부른데 자극적인 떡볶이, 라면, 치킨과 같은 것들이 당긴다. 주로 탄수화물에 짜거나 매운맛을 떡칠한 그런 맛. 동시다발적으로 오늘따라 남자 친구의 말투가 미묘하게 맘에 안 든다거나 절친한 친구들 사이에서 대화 중에 '이거 기분 나쁜데, 지금 내가 예민해?' 하는 일이 발생한다. 감정이 널뛰기처럼 출렁댄다. 이런 쿨하지 못한 나 자신에게 짜증이 솟구친다. 매달 똑같진 않지만 약간의 정도의 차이를 두고 나에게 벌어지는 일이다. (절대 모든 여성이 이렇지는 않다. 나의 케이스는 이렇다는 것.)


어릴 땐 내 몸과 감정을 자세히 관찰하지 않아서 내가 호르몬의 노예인 줄 잘 몰랐다.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생리통이 워낙 심해서, '생리=생리통'이라는 게 다였다. 그때는 약도 잘 듣질 않아서 야자 시간에 고통스럽게 앉아서 부들부들 떨며 버티기도 했다. 고3 때는 아예 앉아 있는 것도 불가해서 약 먹고 누워 있느라 귀중한 하루를 공치기도 했다. 그래서 아마 나를 포함한 고3들 사이에서는 수능 당일에 생리를 하느냐 마느냐가 일생일대의 문제였을 거다. 나는 예상일이 애매했고 불안한 나머지 결국 피임약을 먹어서 억지로 생리를 뒤로 늦추고 시험을 치렀다. (혹시라도 생리를 할까 봐 그렇게까지 해야 한다는 사실이 굉장히 억울하기도 했다.) 놀랍게도 입시 스트레스 해방과 동시에 생리통이 훨씬 나아졌다. 생리통이 완화되면서 다른 변화들이 좀 더 두드러지기도 했고, 무엇보다 내 몸의 상태를 기록하면서 점점 패턴이 선명해졌다. 심지어 얼마 전에는 정말 말도 안 되게 갑자기 치킨이 너무 먹고 싶은 거다. 혹시나 해서 캘린더를 위로 올려봤더니 정확히 한 달 전, 딱 그 시기 배란기에 치킨이 너무 당겨서 사 먹었던 과거의 내가 있었다. (친구는 이 정도면 바이오 리듬이 아니라 치리오 리듬이라고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호르몬의 노예이면 안 되는 줄 알았다.


무슨 일을 하든 "저.. 제가 오늘 그 날이라서요." 하는 건 인생의 변명이라고 생각했다. 그건 프로페셔널하지 않으니까. (여전히 그렇고, 어디서도 그렇게 변명하지는 않는다.) 호르몬의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자체가 어딘가에 지는 것 같고 현대 여성의 미덕(?)이 아닌 기분이 들곤 했다. 그래서 무의식적으로 절대 그러면 안 된다는 원칙이 있었다. 사실 호르몬의 영향을 받는다고 해서 남들에게 피해를 주거나 할 수 있는 일을 포기하지만 않으면 되는데. 나 스스로 인정하는 것 자체가 왜 그렇게 싫었을까?


오히려 '그래, 나는 호르몬의 노예다!'라고
스스로 쿨하게 인정해버리는 편이
인생에 도움이 된다.


여기서 중요한 건 '난 지금 호르몬의 노예니까 맘대로 해도 다 괜찮아! 먹고 싶은 거 다 먹어! 짜증 나고, 힘든 게 당연해!'를 말하는 게 절대 아니다. 몸이 갑자기 부었을 때, '아 도대체 왜 살이 찌는 거야? 오늘 먹은 건 샐러드 풀떼기 밖에 없는데.' 하면서 짜증이 솟구치는 것보다는 '지금은 시기상 몸이 부었지만 이건 대자연이 휩쓸고 가면 경험상 바로 다시 가라앉는다는 걸 알아. 스트레스 받지 말자.' 하는 편이 훨씬 도움된다. 갑자기 감정 기복이 심할 때도, '난 대체 왜 이런 성격이야? 왜 이렇게 속이 좁고 예민하지?' 보다는 '지금이 예민한 시기라서 내가 더 민감하게 반응하나 보네, 다시 냉정하게 생각해보자.' 라고 현명하게 대처할 수 있다.


내 몸에 일어나는 변화를 이해하면
그 변화를 컨트롤 하기가 훨씬 쉬워진다.


내가 자주 하는 말 중에 '호르몬은 사이언스'라는 말이 있다. 생리 현상이니 과학적인 현상으로 이해하자는 뜻이다. 감기에 걸리면 콧물이 나고, 장염에 걸리면 열이 나듯이, 코로나로 바깥 활동을 못해서 심리적인 답답함과 우울이 생겼듯이, 생리를 하는 것도 사람마다 개인차가 있지만 분명 크고 작은 영향과 패턴은 있을 거라고. 생리 중엔 보통 운동을 쉬는 게 대부분인데, 나는 오히려 직전에 운동하는 게 몸에 무리가 가고 생리 첫 날을 제외하고는 운동을 하는 편이 좋다. 그리고 호르몬에서 해방되는 한달의 절반의 시간(최상의 컨디션)을 더 소중하고 계획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결국 내 몸을 더 자주 들여다 보고 기록하고 이런저런 시도를 하면 나 자신 사용법을 더 잘 알게 된다. 컨디션의 변화를 이해하고 현명하게 대처할 것. 오늘도 나는 호르몬의 노예로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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