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함에 발버둥 친 나의 20대
나의 20대가 100일도 남지 않았다. 캠퍼스 앞 지하에 있던 작은 노래방에서 스물아홉의 고학번 선배가 부르는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를 들으며 킬킬대며 웃던 스물한두 살의 나도 서른을 맞이 하는구나. 그때의 나는 30대가 된다는 건 모두가 인정하는 '젊음'이 끝나는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눈앞에 닥친 30대는 예상보다 젊은 어른이었다. 게다가 오히려 좀 더 안정적인 삶의 궤도에 들어서는 기분이 들기도 해서 생각보다 다가오는 30대가 싫지만은 않다.
오히려 지나간 20대의 나를 돌이켜보니 어쩐지 짠하고 가엾다. 나의 20대를 관통하는 단 하나의 키워드는 '특별함에 대한 갈망'이었다. 10년 동안 나는 특별한 무언가가 되고 싶어 발버둥 쳤다. 색깔을 가져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 잡혀 항상 조급했다. 하나에 꽂혀서 몰입하지 못한다는 자괴감은 나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그래서 내 모습을 몇 배로 부풀리고 꾸며서 어떻게든 달라 보이려 애썼다. 때때론 스스로를 속여서 억지 열정을 만들고 미친 듯 빠져 보려고 노력하기도 했다.
평범 콤플렉스는 유독 나에게만 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순위대로 피라미드의 자리가 주어지는 오디션 프로그램처럼, 선택받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뚫어야 젊은 세대들이 함께 공유하는 아픔이다. 우리 세대의 칼바람 부는 취업 시장은 부적격한 사람을 소거해 탈락시키는 과정이 아니었다. 특별하고 쓸모 있는 스펙을 가진 최적의 사람만을 고르고 골라 살아남게 되는 서바이벌이었다. 우리는 아등바등 열심히 살아왔더라도 내 옆의 사람과 차별화되는 무언가가 없다면 탈락하는 게임을 해왔다. 꼭 취업에만 국한되는 현상도 아니다. 나는 슬픔도 자랑이 되는 시대에 씁쓸함을 느낀다. 더 정확히 말하면 슬픔도 콘텐츠가 되는 시대. 몇 년 새 떠오르는 슬픔 콘텐츠(우울증/ADHD/공황장애 등을 다룬 에세이나 영상)을 보고 있으면 자신의 아픔을 극복하고 기회로 만드는 멋진 사람들을 존경하게 된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슬픔을 느끼는 것마저도 그렇지 않은 누군가와의 차별점이 되는 세상이라고 느낀다.
지금이라도 <스물아홉 생일, 1년 후 죽기로 결심했다> 소설처럼 미친척 다른 사람이 되어 볼까? 하지만 지난 10년 동안 나는 뭐 하나에 꽂히는 게 없는 사람이라는 결론을 얻었다. 그게 뭐든 끝까지 파고 들만큼 내 마음을 사로잡는 게 없다. 재미없지만 어쩔 수 없다. 노력이 필요한 무엇은 더 이상 순수한 애정이 아니고 이게 나니까. 신기하게도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나니, 비로소 나의 특별할 것 없던 20대가 소중해졌다. 그리고 이 시대의 가장 평범한 스물아홉인 나의 시선을 기록하기로 했다. 인생에 특별한 무언가가 없다고 생각까지 평범한 건 아니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