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트리트 우먼 파이터> 그리고 자기 확신
지나고 보니 나의 20대는 '내가 옳다'라는 생각이 팽배했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고 내가 보는 세상이 전부인 줄 알았던 거다. 나는 연일 화제가 되고 있는 <스트리트 우먼 파이터>의 시청자다. 하지만 처음부터 이 프로그램을 챙겨 보진 않았었다. 나는 힙합, 댄스 그리고 m.net 특유의 편집 스타일까지 셋 중 어느 하나도 좋아하지 않는다. (오히려 싫어하는 쪽에 가깝다.) 그래서 핫한 콘텐츠인걸 알고 있었지만 취향과 맞지 않아 그러려니 했다. 그러다 지인의 강력한 추천을 받고 무심코 1화를 틀고선 새벽 4시까지 밀린 5화를 한 번에 다 시청해 버렸다. <스트리트 우먼 파이터>를 보고서 별 관심 없던 힙합과 춤을 사랑하게 되는 반전은 당연히 일어나지 않았다. 그 대신 아주 매력적인 사람을 한 명 알게 됐다.
아이키라는 댄서는 <유 퀴즈 온 더 블록> 인터뷰를 통해서 처음 알게 됐다. '해외 댄스 대회에서 실력을 인정받았다.' 정도로 기억이 나는, 큰 감흥을 준 인터뷰이는 아니었다. 이후에도 SNS에서 그녀의 틱톡 댄스 영상이 자주 지나쳐갔지만 워낙 그쪽 장르에 관심이 없어서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런데 <스우파>에서 얻은 기대 하지도 않았던 수확은 아이키의 인간적 면모였다. 아이키는 유쾌하고, 창의적이고, 리더십이 뛰어났다. 그녀는 삭막하고 진지한 분위기를 가볍게 무장해제시키는 편안함을 가졌다. (1화의 가비와의 댄스 배틀 장면에서 이 매력이 극명하게 발산됐다.) 그리고 '넘버 원이 아닌 온리 원이 되자'는 그녀의 좌우명처럼 그녀는 모든 무대에서 다른 그룹과는 완전히 다른 hook만의 스타일을 만들어 낸다. 비상한 전략가이면서 동시에 천방지축 개구쟁이 같달까. 마지막으로 그녀의 확실한 능력을 바탕으로 어린 크루들을 부드럽게 포용하는 리더십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스우파>는 댄스 크루들의 이야기지만 아이키는 내가 속한 사회와 조직에서 필요한 센스를 응집해놓은 사람 같았다. 물론 멋있는 아이키를 논외로 하고도 <스우파>를 통해 나와 다른 직업(댄서)을 가진 이들의 삶이나 각각의 단체가 만드는 색다른 결과를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어릴 땐 대중적인 것에 알 수 없는 반항심이 있었다. 모두가 좋아하는 것에는 별 게 없어 보였다. 그래서 자주 가던 가게도 유명세를 타면 더 이상 방문하지 않게 되고, 베스트셀러 자리에 오래 걸린 책일수록 일부러 구매하지 않았다. 그런데 요즘은 대중적인 인기가 있는 곳에는 확실히 무언가 있다고 느낀다. 거기서 뭘 느끼는지는 개개인마다 다르겠지만, 많은 이들이 열광하는 것에는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고. 내가 만약 영원히 <스우파>를 보지 않았다면 진짜 아이키의 매력, 내가 닮고 싶은 이상적인 인간의 모습을 발견할 기회를 놓쳤을 거라고 생각한다. 대중적인 것이 늘 옳다거나 꼭 경험해 봐야 한다는 주장을 하려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다만, 많은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인기를 얻는다는 이유만으로 어떤 것을 우습게 보는 건 바보 같은 짓이었다.
싫어하는 음식이나 사람이 시간이 지나 좋아질 때가 종종 있다. 지인들 중 10년을 넘게 보니 처음에 눈에 띄던 싫었던 점보다 나중엔 좋은 점이 더 많아져서 결국은 좋은 사람이라고 결론짓게 되는 사람도 있다. (물론 그 반대도 있지만) 그래서 '좋다'는 말보다 특히나 더 '싫다'는 말을 조심스럽게 해야겠다고 느낀다. 단단하게 구축한 불호가 언젠가 무너질 수도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20대가 자기 확신을 만들어 간 시기였다면, 앞으로 다가올 30대는 내가 만든 확신을 깨부수고 또 다른 세계로 확장해 나가는 시간이 될 것 같다. 그걸 깨닫게 해 준 제 이상형 아이키님께 심심한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