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시애틀
계절이 몇 번을 바뀐 어느 날. 세탁을 맡기러 옷장 안에 있던 트렌치코트를 꺼내 주머니를 뒤적였다.
어? 그 순간 내 손에 잡힌 건 티켓 한 장. 그것은 시애틀 시내를 순환하는 모노레일 티켓이었다.
몇 번의 계절이 피고 진 오늘에서야 발견된 티켓이 순식간에 날 시애틀로 공간이동을 시켰다.
시애틀을 다녀왔던 두 번 모두 봄이었지만 왠지 나에겐 늦가을 정도의 느낌으로 남아있다. 쓸쓸함과 촉촉함이 묻어있는 그런 그곳의 공기... 어쩌면 시애틀의 가을을 배경으로 한 영화들의 계절감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사실, 두 번이나 시애틀이 나를 이끈 이유는 <치훌리 가든>에 반해서였다.
화려한 색채감과 영롱한 치훌리의 작품들은 환상 속으로 들어온 듯 시공간의 감각을 잊게 했다.
시애틀에선 시내 주요지를 순환하는 쾌적한 모노레일을 타면 저절로 시티 투어를 하는 듯 재미가 쏠쏠하다. 내 걸음은 어느새 ‘퍼블릭 마켓’에 이르렀다. 싱싱한 어류와 채소를 파는 노점들, 레스토랑과 카페를 지날 때 북적이는 활기를 온몸으로 느끼면 괜히 발걸음마저 설렌다. 내리막 길엔 영화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의 톰 행크스가 엉덩이를 실룩이며 장난스레 농담을 던지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걷고 있자니 시장기가 느껴져 우선 해산물이 듬뿍 들어간 진하고 따끈한 클램 차우더로 속을 데우고 나서,
다시 골목 사이를 누비는데 와인 바가 눈에 띄었다. 이끌리 듯 테라스 석에 호젓하게 자리 잡고 와인을 주문한다. 따스한 햇살이 어깨 위로 스미는 것을 느끼며 사람 구경을 하던 나는, 이내 시간이 더디 가는 것을 깨달았다. 나의 존재를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 사이에 끼어있는 이 안락함이란 무엇일까? 노곤해진 몸을 그대로 의자에 맡긴 채 스르르, 잠시 눈을 감고 잠 잘 오는 시애틀을 누려본다. 맥 라이언의 운명 같은 사랑이 아니면 어떠한가. 지금, 여기에, 내가 있다는 게 중요한 거지.
그러다가 퍼블릭 마켓의 스타벅스 1호점으로 발걸음을 옮겼지만 사람들로 붐벼 그냥 지나쳤다. 대신 대형 커피숍으로 오픈한 스타벅스 리저브&로스터리 본점으로 향했다. 복층으로 이뤄진 아래층에 거대한 커피 로스터가 돌아가고 있다.
흐린 날의 묵직한 시애틀의 공기는 커피를 부르고 바리스타가 정성스레 내려주는 따뜻한 한잔에 테라피를 받는 듯한 오후.
카페를 나와 어딘지 모를 조용한 동네를 목적 없이 걸었다. 작은 베이커리와 개성 있는 옷가게들. 심심하지 않은 시애틀의 골목이었다. 우연히 발견한 호텔 앞의 작은 극장에서 좋아하는 애니메이션 '추억은 방울방울'을 보게 되어 얼마나 반가웠던지... 여행지에서 예기치 않은 조우로 즐거움이 배가 된다.
흐린 날도 화창한 날도 시애틀의 항구는 또 다른 낭만이 있다. 목적 없이 해안을 따라 걷다가 시애틀 항구까지 다다랐다. 이윽고 독특한 오리배 버스가 눈에 들어온다. 영화 <만추>에서 탕웨이와 현빈이 애잔한 추억을 만들던 일명 '오리 배 버스 투어'를 놓칠 수 없지 않은가? 육지와 바다를 오가며 달리는 수륙양용 버스 안에서 유쾌한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며 시애틀의 풍경이 스쳐간다. 영화 장면에도 나왔었던 이 오리 배 투어의 규칙이 있다. 바로 '오리 배 안에서 있던 일은 오리 배 안에 놓고 가기!' 그렇지만 , 시애틀의 추억이
철 지난 코트 주머니 속에서 다시 고스란히 발견되어 어길 수밖에 없었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