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계산
통장에 남은 잔액은 824,401원이다. 오늘 받은 지역 상품권이 만 원 남짓 되고, 사나흘 후에 들어올 일당은 세금을 떼고 나면 19만 원이 좀 안 되게 들어 올 것이다. 몇 개 안 되는 옷가지를 뒤져서 나온 잔돈들이 2만 원 남짓 있었고, 사용할 수 있는 커피 상품권이나 편의점 상품권도 몇 개 있다. 선물로 받은 위스키는 급할 때 팔면 몇십만 원은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카드는 벌써 예전에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지금 사용하는 카드도 어머니 대신 공과금을 내기 위해 만들어서 관리하던 것이다. 어머니 계좌마저 없었다면, 아무런 금융거래를 할 수 없을 뻔했다. 다행히도 이사해서 카드값이나 대출 연체 독촉장은 안 받아도 되고, 전화 올 사람도 없어서 채권 추심 전화도 안 받는다. 이럴 줄 알았으면, 카드빚이라도 갚지 말았어야 했다. 그랬다면, 남은 현금이라도 좀 있었을 텐데, 미련하게 연체를 줄이겠다고 남은 돈을 빚을 갚는 데 썼는데, 모든 계좌와 카드마저 동결되어 버렸다.
빚쟁이가 살기에 럭셔리한 이 집은 회색 대리석 무늬의 타일로 된 아담한 거실과 비를 잔뜩 머금은 짙은 먹구름 같은 푸른빛을 띠는 회색 싱크대와 주방, 적당한 크기의 흰 대리석 식탁이 높여 있고, 주방을 등지고는 차가운 느낌이 드는 짙은 회색의 천으로 된 소파가 길 쪽으로 난 거실 창을 향해 있었다. 비가 오는 날이면 소파에 누워 창을 바라보곤 했다. 마치 비 오는 거리에 서 있는 듯이 개방감이 좋은 거실이다. 모든 것을 실패하고 수중에 남은 돈마저 바닥나버린 지금 세련된 인테리어의 신축 빌라에 살고 있어서 더 비참했다가, 덜 비참했다가, 다행이었다가, 불행했다가를 하루에도 수없이 오갔다.
오늘, 결국 마지막으로 타던 차까지 공매로 넘겨주고, 씁쓸한 마음에 잘 마시지도 않던 소주 두 병도 사 왔다. 술을 마시기 전에, 이제부터는 하루하루를 단정히 살아야겠다는 비장한 심정으로, 지금 형편에 맞지 않게 세련된 집을 정리했다. 옷가지를 정리하면서 주머니를 뒤지고, 필요 없는 것들을 버리고, 한동안 부산스럽게 정리를 마쳤다. 돈이 드는 것도 아닌데, 그 많은 날을 이렇게 개운한 기분으로 살지 못하고 언제나 어지럽게 살았을까를 한탄하면서, 소주잔에 첫 잔을 따랐다.
‘이제 통장에 백만 원도 안 남았구나! 더는 못 버티겠지, 오래 버텼다.’
단 소주를 삼키기도 전에 다시 분주히 돈 계산을 시작했다. 몇 잔은 더 마셔야 있지도 않은 돈 생각을 그만할 수 있을 것이다. 통장 잔액과 사용할 수 있는 상품권, 앞으로 들어올 돈을 계산해보니 수중에 1,050,000원쯤 있고, 쿠폰으로 아직 커피도 사 먹을 수 있겠다.
‘그래도 얼마간은 견딜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쓸 수 있는 돈이 아직 백만 원 넘게 남아있다는 생각이 들자 살짝 안도가 되면서, 더는 생각하기 싫어 급하게 남은 술을 마셨다. 술기운이 돌자 겨우 생각이 느려지면서 누울 수 있었다. 술기운 덕분에 현금+통장 잔액 같은 아무리 반복해도 늘어나지 않는 돈 계산은 멈출 수가 있었지만, ‘백만 원으로 어떻게 잘 버틸 것인가’에 대한 허황된 계획은 계속 떠올랐다. 지금이라도 백만 원으로라도 주식이나 코인을 해볼까 생각이 들다가도, 그나마 겨우 남은 돈조차 나를 위해 쓰지 못할 것이고, 얼마 되지 않는 돈을 벌더라도 모든 시간을 몇만 원을 버느라 소모해버려야 할 것이 뻔했다. 일용직을 나갈 때처럼 위험하고 힘들지만 당장 돈을 받는 일을 구해볼까도 생각했지만, 일이 힘들면, 더 쉽게 예전처럼 사고를 치거나, 일이 서툴러 눈총을 사게 될 것이다. 이미 다 시도해봤던 일이다. 그렇다고 새 직장을 구하거나 아르바이트를 하려고해도 빨리 일을 구하지 못하면 구직 활동을 하는 사이 돈이 다 떨어질 것이고, 첫 월급이 나올 때까지 버틸 수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어쨌든 아직 백만 원 남짓 여유가 있으니 오늘은 그냥 자야겠다.
어둠 속에 누워서 자기 전에 습관처럼 인스타그램을 열어서 넘기면서 딴생각을 하고 있었다. ‘남은 백만 원으로 남들이 가는 좋은 식당에서 좋은 대우를 받으며 고급 음식이나 실컷 먹을까?’, 아니면, ‘좋은 호텔에 가서 마지막 순간을 보낼까?’, ‘하고 싶은데 하지 못했던 일을 해볼까?’, 다른 사람들의 행복을 보면서 이번에는 ‘백만 원을 어떻게 잘 써 버릴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 초라한 차림으로 좋은 식당에서 몇만 원을 쓰고 오면 오히려 스트레스가 될 것 같았고, 이 상태로 좋은 호텔에 간다한들 마음과 주머니가 모두 가난한 자에게는 집이나 호텔 방이나 걱정으로 가득 채울 것은 다르지 않다. 호텔에서 마지막 순간을 보내서, 내 불행한 처지가 도시 전설로 남고, 다른 사람들에게 민폐를 끼치는 것도 싫었다. 딱히 가보고 싶은 곳도 없었고, 어딜 가도 돈 생각에 움츠러들 것 같았다. 인스타그램 안의 사람들은 좋은 것을 먹고, 좋은 곳에 가고, 선물을 주고받으면서 기념일도 챙기고 잘 살고 있는데, 내게 남은 백만 원 만큼의 행복도 누리지 못하고 어떻게든 버틸 생각을 하는 내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한심하니까 이 지경이 됐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