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만 원
평온한 어둠 속에서 잠을 이룰 수 없게 무언가가 자꾸 반짝거렸다. 아까 본 ‘비용 없이 자가출판으로 책 쓰기’ 광고였다. 책을 내는 비용은 무료였지만, 수업료는 20만 원이었는데, 백만 원 중에 20만 원쯤은 호텔이나 비싼 식당에 가는 것에 비하면 비싸지도 않았고, 의미 있는 일일 수도 있겠다. 어린 시절에 글쓰기는 언제나 칭찬을 받았었고, 언제 마지막으로 들어본 적이 있나 싶은 칭찬을 받을지도 몰랐다.
백만 원 있는 사람이나 80만 원 있는 사람이나 다를 것 같지도 않다. 갑자기 몸이 더워지면서 이 강의를 신청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불도 켜지 않고, 다급히 아까의 광고 페이지를 찾아 들어갔다. 결제 버튼을 누르려다가, 그래도 혹시 몰라서 불을 켜고, 앉았다. 장소를 확인해보니 교통비를 들이지 않고 걸어갈 수 있는 곳이었고, 우연히 본 책 쓰기 수업이 집 근처에서 한다는 것 자체가 행운이면서, 운명 같았다.
책 쓰기 수업에 대한 설명은 ‘책을 왜 써야 하는지’부터, 일정, 커리큘럼까지 끝도 없이 이어져 있었다. 초저녁부터 온갖 생각에 지쳐서 수업 과정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눈에 들어오지도 않고 이해도 잘 안 됐다. 걸어서 갈 수 있는 곳이라면, 어차피 갈 데도 없는데 시간도 요일도 중요하지 않다. 아직도 뭔가 좋은 일, 의미 있는 일을 할 수 있다면, 다른 조건은 상관없었다. 수업의 질이 나쁘면, 갈 곳이 생겼다는 것만으로도 괜찮을 것이고, 글 쓰는 것 따위야 알아서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정기적으로 깔끔하게 차려입고, 무언가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잠시라도 생기는 것으로도 이득인 것 같았다. 수업은 유료지만, 책을 내는 데는 돈이 전혀 들지 않는다니 잘하면 책을 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해도 되지 않는 복잡한 설명을 그만 읽기로 하고, 무작정 결제 버튼을 눌렀다. 계좌이체를 하는 단계에서 잠시 멈칫했지만, 망설이다가는 백만 원치의 인생마저도 근근이 버티다가 의미를 잃게 될 것이다. 어차피 열심히 노력하고, 신중하게 결정한 일들도 잘된 일은 없었다. 충동적으로 결정해서 안 된다는 보장도 없다. 하고 싶은 일을 단 하나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마도 아침이 되어서, 세상이 가난과 절망, 부끄러움을 구석구석 찬란하게 밝히면, 이마저도 결제하지 못할 것이 뻔하다. 백만 원짜리 인생이나 80만 원짜리 인생이나 거기서 거기다.
결제 버튼을 누르고서도 온갖 불안과 갈등을 떨쳐가면서, 이름을 쓰고, 주민번호를 입력하고 비밀번호를 쓰고, 지문 인증을 해가며 결제를 마쳤다. 핸드폰이 오랜만에 좋은 소식으로 울리면서, 결제 완료를 알렸다. 연달아 강의 관련 안내 사항이 문자로 길게 왔지만, 너무 피곤해서 아침에 확인하기로 하고 다시 불을 끄고 누웠다.
아주 오랜만에 행복하다고 느꼈다. 오랜만에 먹고 사는 것 말고,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결정을 하기를 잘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처음 잠자리에 누울 때처럼 온갖 생각이 다 떠올랐지만, 이번에는 기대감이 섞인 것이었다. 잠들기 직전에 통장 잔고는 백만 원이 아니고 80만 원뿐인데 20만 원을 써버려서 남은 잔고가 60만 원뿐이라는 것이 생각났다. 순간 화끈 열이 오르면서, 괜히 돈 계산을 해서는 100만 원이 있다는 착각에 20만 원을 썼다는 자책이 들었지만, 진짜 너무 피곤해져서, 될 대로 되겠지 자포자기하는 심정이 들었다. 바깥은 아직 어두웠지만, 차 소리와 사람들이 오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봐서 5시 가까이 된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비로소 잠이 들었다.
아침이 다 돼서 잠이 들었기 때문에 점심때나 일어날 줄 알았는데, 묘한 흥분 때문에 8시가 좀 넘어서 눈을 떴다. 눈을 뜨자마자 통장 잔액이 60만 원이라는 것이 떠올랐다. 낮에는 핸드폰을 만지고 있다가는 당황스러운 독촉 전화를 실수로 받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황급히 통장 잔액을 확인하고, 결제 문자와 강의 안내 문자도 확인했다. 강의 안내 문자는 차차 보기로 하고, 통장 잔액을 확인했는데, 온라인 포인트 2만 몇천 원 남은 것을 결제할 때 사용하고, 쿠폰도 적용하고 해서, 덜렁 62만 원일 줄 알았던 통장 잔액이 65만 9344원이 남아있었다. 우습게도 그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졌다. 그 책 쓰기 강의가 나를 위해, 운명적으로 나타난 것만 같았다.
처치 곤란이던 온라인 포인트도 한 번에 썼고, 쿠폰까지 적용되어서 예상한 가격보다 한참 저렴했다. 결제하길 잘했다고 생각했지만 이내 혹시 포인트와 쿠폰을 사용한 것 때문에 환불 하고 싶어도 환불이 안되는 것은 아닐까 잠시 걱정이 들었다. 만약 전화로 환불 요청을 해야 하는 것이라면, 전화도 자유롭게 쓸 수 없는데 차라리 잘됐다 싶었다. 좋은 식당에 다녀온 셈 치고, 그냥 환불 생각은 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시계를 보니 9시 20분이 넘어가고 있어서, 황급히 핸드폰을 껐다. 낮 동안 핸드폰이 켜져 있으면 불안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래서 낮 동안에는 핸드폰을 꺼둔다. 채권 추심 전화 시간을 제한하는 법을 누가 만든 지는 모르겠지만, 진심으로 여러 사람을 구한 것이라는 것을 몸으로 느끼고 있다.
잠을 제대로 못 잤기 때문인지 몸에 묘한 긴장으로 컨디션이 좋지 않으면서, 졸리지도, 배고프지도 않았다. 언제 팔까 시기를 고민하고 있던, 노트북을 펼쳐서, 어젯밤에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길고 진지한 강의 일정과 커리큘럼, 강사 소개 등 끝없는 설명을 읽어보기로 했다.
‘노트북은 팔지 말아야겠다.’
충동적으로 결제한 것 치고는 강의 내용이 좋은 것 같았고, 설명도 꼼꼼하고 진지했다. 기대도 하지 않았는데 책을 내는 과정은 전자책이 아니고, 종이책을 출간할 수 있는 과정이었다. 전자책을 누구나 낼 수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종이책을 낼 수 있다는 것은 몰랐다. 순간 종이책을 낸다는 것을 구실삼아 돈을 내야 한다고 할까 걱정이 됐지만, 어떤 추가 요금이 들어도 낼 돈이 없고, 전자책은 누구나 낼 수 있다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면 전자책으로 내면 될 것이다. 어쩌면 진짜로 추가비용 없이 종이책을 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면 쿠폰을 적용해서 20만 원도 안 되게 결제한 이 강의는 비싼 호텔보다, 고급 식당보다는 가치 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