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라는 이름의 흔적들
“유방암입니다.” 14년 전, 타오름달이었다.
순간 세상이 멈췄다. 빙벽이 사방을 둘러싸고 뾰족한 고드름이 심장을 찔렀다. 아내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뇌리를 할퀴었다. 우리는 손을 꼭 잡은 채 침묵에 빠져들었다. 숨조차 쉴 수 없는 슬픔 속에 두 발은 땅에 뿌리 내린 듯 움직일 수 없었다.
언제나 짓궂은 미소로 웃음을 선사했던 사람. 내가 해바라기인 양, 고개를 꼿꼿이 들고 앞만 보고 걸어갈 수 있도록 자양분을 주며 삶을 지탱해 주었던 사람. 그런 사람에게 내린 잔혹한 선고였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도시 풍경은 안개에 휩싸인 듯 아른거렸다. 세상의 소음이 멀어지고 정적만이 감돌았다. 심장 소리와 피부를 스치는 뜨거운 바람만이 현실임을 일깨웠다. 걸음마다 발밑이 무너지는 듯했다.
입술을 깨물며 눈물을 삼키는 듯 보였다. 눈에는 강한 의지가 담겨 있었지만, 떨리는 손끝에서 숨길 수 없는 공포가 느껴졌다. 내쉬는 긴 숨은 말 없는 절규로 다가와 내 가슴은 시리다 못해 아렸다.
나는 "괜찮아, 괜찮을 거야"라는 말을 되풀이하다 결국 무너졌다.
“앗, 아니, 그러니까, 이 이, 그러, 와, 완전, 아, 아무, 렇지도 안, 앗”
말과 말 사이로 흐느끼며 한 번 터진 봇물은 그칠 줄 몰랐다. 오히려 내 등을 어루만지며 “괜찮아. 괜찮아.”라고 위로했다. 그 어느 때보다 어이없는 남편이 되었다. 석양이 빌딩 꼭대기에 매달려 지켜보다가 매혹적인 색채를 뿌리고, 사라지며 우리의 그림자를 길게 드리웠다.
병원에서 출퇴근하는 간병인이 되었다. 자는 동안 숨 쉬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손을 코끝에 갖다 댔다. 간병 동안 시선은 아내에게 집중되었다. 한밤중에 깨어 안색을 살피고, 혹시나 하는 불안한 망상에 시달렸다. 매 순간 확인하고 또 살피며 긴장의 연속이었다. 날카로워진 신경은 모든 소리와 감각을 아내의 눈동자로 흡수시켰다. 긴박함이 일상이 되었고, 심장이 타들어 가는 불안감에도 반드시 살리겠다는 결심으로 버텼다. 이 여정은 끝이 보이지 않는 미지의 길이었다.
주변에는 의사 아닌 의사가 참 많았다. 지인들은 여기저기서 들은 암 치료법을 알려주거나 각종 약제를 건네며 쾌유를 빌었다. 주치의는 민간요법 대신 자신의 말만 믿고 따르라 권유했다. 깊은 고민 끝에 주치의를 믿기로 했다.
유방 전절제 수술과 항암, 방사선 치료는 정신은 물론 몸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주변의 관심과 안타까움은 오히려 불편함을 주었다. 점점 사람들을 피하며 마음의 문을 닫았다. 외로움의 흔적이 깊게 주름져 갔다. 나는 무기력하게 그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한적한 곳으로의 이주를 간절히 바랐다. 눈빛에는 깊은 피로와 절망이 서려 있었고, 낯빛에는 오래된 비애가 깃들어 있었다. 삶의 끝자락에서 고요한 안식처를 찾는 사람처럼 느껴져 의식적으로 그 요청을 피했다.
1년이 지나자, 우울증 진단을 받았다. 이는 또 다른 벼락이었다. 일 핑계로 외면했던 내 행동이 결국 나만을 위한 것이었음을 깨달았다. 두고두고 후회했다.
도시의 모든 관계를 과감히 정리하고 고즈넉한 시골로 이사했다. 함께 사는 의미를 찾아 새롭게 출발했다. 텃밭을 가꾸고, 산행을 즐기며, 아내의 소망을 들어주려 애썼다. 우리는 서로의 그림자가 되어 함께하는 시간을 소중히 여겼다.
몇 년 후, 갑상선암 진단이 또 다른 시련으로 다가왔다. 의사는 성대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복잡하고 위험한 수술이라 했다. 수술 후 6개월간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맑고 고운 목소리는 내 마음을 사로잡은 첫 번째 이유였다. 이제 천상의 악기는 사라졌지만, 지금도 여전히 목소리는 즐거운 음색으로 심장에 파고든다.
건강은 여전히 쉽지 않았다. 암세포가 반대편 가슴으로 전이되어 다시 수술을 받았다. 이번에도 무사히 지나가기를 바랐다. 이번이 마지막이기를 간절히 바랐다. 아픔을 견디며 매일 밤 기도를 드렸다. 시간은 무겁게 흘러갔다. 얼굴은 울었던 흔적과 괴로움이 역력했다. 여러 차례 수술의 고통을 헤아릴 수 없었지만, 이를 지켜보는 남편으로서 가슴은 찢어졌다. 꺼져가는 세상을 껴안듯 서로를 의지하며 걸어왔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은 나비처럼 춤추며 나를 한바탕 웃게 하였다. 햇살에 눈부신 피부는 내면의 기운으로 빛나며 얼굴에 따스한 온기를 불어넣었다. 눈동자는 별이 담긴 듯이 반짝거렸다. 눈 속에 삶의 희망과 용기가 빛나고 있다는 것을 내게 알려주었다.
아픔의 강을 건너서 전이가 멈춘 지 5년이 되던 매듭달, 정기검진 결과가 나오는 날 아침의 모습이었다. 유방암을 시작으로 여러 차례 수술을 받으며 12년의 긴 여정을 감내한 강인한 여전사였다.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시계바늘은 모래 속에 갇힌 듯 느릿하게 움직였다.
“이제 완치라 할 수 없지만, 앞으로 조심만 하면 더 이상 걱정할 일은 없을 겁니다.”
의사의 부드러운 음성이 방 안에 가득 채워졌다. 감미로운 솜사탕이 입술에 닿아 온몸에 스며들었다. 눈물로 씻은 긴 세월이 마침내 고요한 호수처럼 잔잔해지는 순간이었다.
아내의 얼굴은 여명의 여신, 에오스가 붉은빛으로 물든 부끄러운 얼굴로 대지를 밝히는 모습과 닮았다. 설렘과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미소가 번졌다.
창밖으로 펼쳐진 파란 하늘을 바라보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한없는 기쁨으로 출렁대는 가슴을 심호흡으로 진정시켰다. 내 눈가는 이슬로 반짝였다.
“나를 지켜줘서 고마워.”
달빛이 부드럽게 어깨 위로 쏟아지던 밤, 감미로운 벼락을 맞은 듯했다. 투병 기간 듣지 못했던 말이었다. 그 말은 달콤한 전율이 전해주는 천둥소리였다.
“아니야. 살아줘서 고마워.”
시골길을 걸으며 사랑을 속삭였다. 축포가 은하계를 쏘아대듯 별바다를 펼친 밤하늘이 우리를 내려다보았다. 산봉우리에 걸린 보름달이 우리를 축복한 후 다른 이의 사랑을 찾아 나섰다.
눈물이 뺨을 타고 떨어졌다. 함께할 내일에 대한 불꽃같은 희망이 타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