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의 정원

사랑이라는 이름의 흔적들

by 가슴속호수

의사의 입에서 "유방암입니다"라는 진단이 떨어진 순간, 병원의 백색 형광등 아래 창백해진 아내의 손을 잡으며 무력함의 심연을 경험했다.

삶의 가장 어두운 순간에서, 도시의 번잡함과 질병을 부추기는 스트레스를 뒤로하고 합천으로의 귀촌을 결심했다. 자연 속에서 병든 육신과 지친 영혼이 치유될 것이라는 희미한 확신이 내 안에서 자라났다.

합천에 도착한 첫날, 새벽녘 창문으로 스며드는 산의 서늘한 공기에 잠에서 깨어 밖을 바라보니, 동이 트는 하늘에 마지막 별 하나가 깜빡이고 있었다. 그것은 작은 희망의 파문처럼 느껴졌다.

이슬 머금은 풀잎 사이로 걸으며 촉촉한 흙냄새가 폐 깊숙이 스며들어 마음을 정화했다. 항암치료로 처진 몸은 기력을 회복해 나갔고, 발걸음은 점차 가벼워졌다. 아내의 얼굴에 오랜만에 피어난 미소는 잃어버린 시간이 다시 돌아온 순간이었다.

봄이 오자 작은 정원의 꽃들은 아내의 웃음을 닮아 향기로웠다. 아침 햇살이 진달래 꽃잎을 비출 때마다 세상의 색채가 생명력을 얻어 춤추는 듯했다. 밤마다 쏟아지는 별빛은 잊고 있던 설렘을 되돌려 주었고, 병원의 차가운 형광등 아래에서보다 별빛 아래서 얼굴은 한층 생기 있었다.

숲길에서 걸으며 마음을 비웠다. 나무 그림자가 발걸음마다 함께 움직이고, 바람이 잎 사이로 속삭이듯 소리 내었다. 도시의 소음 대신 작은 새의 지저귐, 개울물 흐르는 소리, 풀벌레 우는 소리가 귓가를 채웠다. 자연 속 작은 것들이 용기를 선사했다. 손을 맞잡고 서로를 느끼며 그 순간을 간직했다. 평온함이 내면을 단단하게 했다. 나무들이 수십 년을 한 자리에 뿌리내리듯, 이곳에서 삶의 깊이를 더해갔다.

어느 날, 산에서 약초를 채집하다 가파른 비탈에서 미끄러졌다. 데굴데굴 구르다 수직 절벽 아래로 떨어질 뻔했다. 안도감이 파도처럼 밀려온 그 순간, 아내는 놀라움을 멈추고 손을 가늘게 떨며 크게 웃었다. 그 웃음소리는 깨끗한 산골 계곡물처럼 청명하게 울렸다. 그때 깨달았다. 웃음이야말로 질병을 이겨내는 가장 강력한 치유의 힘임을.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느낀 순간의 소중함이 시간에 깊이를 더했다.

장마 후 개천에서 수초에 갇힌 잉어를 맨손으로 잡던 날, 차가운 물살과 미끄러운 물고기의 감촉은 원초적 기쁨을 선사했다. 흙탕물 속에서 헤엄치는 내 모습에 아내가 터트린 웃음소리는 암세포까지 흔들어 놓았으리라 믿는다.

도시에서는 이웃의 얼굴조차 모른 채 살았지만, 이곳에서는 서로의 기쁨과 슬픔을 나누는 진정한 소통이 있었다. 약이 된다며 건네준 산나물, 집 앞에 놓고 간 신선한 달걀 한 줌, 이른 아침 병문안으로 들고 온 갓 구운 빵 한 조각. 이런 마음들이 모여 병마와 싸우는 힘이 되었다.

평온한 일상에서도 현실은 불쑥 찾아왔다. 병원 검진 날짜가 다가올 때마다 느껴지는 긴장감, 아내의 얼굴에 스치는 불안은 여전히 싸우고 있는 전쟁을 상기시켰다. 질병의 그림자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한편으로는 마을 공동체의 갈등도 있었다. 토착민들 사이의 농지 이용과 개발 문제를 둘러싼 의견 차이가 날카롭게 대립했다. 귀촌인으로서 어느 편에 서라는 무언의 압박 속에서도 중립을 지켰다. 누군가의 편을 들기보다는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가는 것이 때로는 더 큰 용기임을 깨달았다. 병마와의 싸움과 마을의 화합 사이에서 균형을 찾는 지혜를 배웠다.

텃밭을 가꾸는 일은 육체노동을 넘어 마음의 밭을 일구는 소중한 의식이 되었다. 삽으로 흙을 파며 느낀 거친 촉감과 습한 냄새는 도시에서 잊고 살았던 감각을 일깨웠다. '삽질하고 있네'라는 말이 떠올랐지만, 흙을 만지며 느낀 평화는 삶의 본질을 돌아보게 했다. 손목 보호대를 차고 치료받는 날이 많았어도, 고통 속에서 성장하는 식물처럼 어려움 속에서 더 강해졌다.

계절이 바뀌며 건강은 조금씩 회복되었다. 빼곡한 나뭇잎 사이로 들려오는 새소리가 마음을 쓰다듬고, 깊은숨을 내쉬며 바라본 광경에서 기쁨을 찾았다. 아침 안개 속에 잠긴 산자락, 석양에 물든 들판, 빗방울에 씻긴 나뭇잎의 반짝임까지 모든 순간이 선물로 다가왔다.

세월이 흘러 사랑하는 이의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치료의 고통 속에서도 마침내 피어나는 아침의 미소는 깊은 안도감을 주었다. 병원 검진 결과도 점차 개선되었다. 과학적 치료와 자연의 치유력이 어우러져 기적을 이루고 있었다.

이곳에서 나날은 잃어버린 시간과 의미를 되찾는 여정이었다. 12년간 4번의 수술과 질병의 어둠을 밀어내는 희망이 오늘을 밝히고, 사랑과 의지가 빚어낸 기적이 내일로 이끌었다. 도시의 편리함과 분주함을 뒤로하고 찾은 시골에서 오히려 더 풍요로운 영혼의 풍경을 발견했다.

저녁 무렵, 텃밭에 물을 주며 생각한다. 암이라는 두려운 이름이 가르쳐준 것은 사실 감사함이었다. 일상의 소소한 순간들, 서로 나누는 눈빛, 함께 마시는 차 한 잔의 따스함까지. 삶은 더 나은 내일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위해 존재하며 감사와 희망으로 나아가는 여정임을 이제는 안다.

밤이면 벤치에 앉아 별을 바라본다. 도시에서는 미처 보지 못했던 수많은 별이 작은 정원을 비춘다. 아내는 미소 지으며 속삭인다. "우리가 별을 심은 정원이네요." 그렇다, 이곳에 별을 심었다. 손을 잡고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깨닫는다. 인생의 가장 어두운 시간이 가장 밝은 별빛을 보게 했음을.

별을 심는 사람이 되어, 오늘도 내일의 빛을 마음에 담는다.

keyword
이전 07화불꽃같은 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