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라는 이름의 흔적들

by 가슴속호수

숨은 단순한 공기의 출입이 아니다. 그것은 존재의 증명이자 시간의 맥박이며 삶과 죽음 사이를 잇는 유일한 다리다. 오래전 아내가 입원한 병실의 어둠 속에서 비로소 깨달았다.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이 하나의 호흡이 얼마나 간절한 기적인지를.

밤이 깊어질수록 아내의 숨소리는 더욱 가늘어진다. 때로는 완전히 멈춘 듯 보이는 순간들이 있다. 그 순간, 손거울을 조심스레 코끝에 가져간다. 뿌옇게 서리는 김 한 점이 오늘 하루의 삶을 증명할 때까지 천당과 지옥을 오간다. 침묵이 길어질 때마다 시간이 멈춘 듯 가슴이 조여 온다. 제발 숨만 쉬어달라는 간절한 외침이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한 채 가슴속에서 돌덩이처럼 무거워진다. 이 작은 흔적 앞에서 깨닫는다. 숨이란 우리가 세상에 남기는 가장 원초적이면서도 가장 숭고한 서명이라는 것을.

정적을 찢는 거친 소리가 울려 퍼진다. 허어억, 헉, 컥. 날카롭게 끊기는 소리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다. 마지막 끈을 붙잡으려는 듯한 헐떡임에 방 안의 공기마저 떨린다. 멈추었다 다시 이어질 때마다 심장이 요동치고 시간은 얼어붙는다. 생명의 미동이 감지되지 않는 순간, 슬며시 몸을 더듬는다. 온 신경이 손끝으로 몰린다. 놀란 듯 허공을 휘젓는 아내의 손이 뺨을 스치며 후려친다. 놀람과 안도의 웃음이 겹쳐 터지고 무너지던 숨이 되돌아온다. 이것이 바로 삶의 실체다. 들숨과 날숨 사이의 아슬아슬한 균형 위에서 우리는 존재한다.

어머니의 마지막 밤이 떠오른다. 죽음의 문턱에서 힘겹게 몰아쉬던 숨소리가 끝내 밤바람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전날 밤까지 울렸던 카 아악, 흐흐 흑, 컥 소리가 마지막 운율을 남기고 꺼지자 다음 날 방 안에는 형체 없는 공허만이 남았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침묵의 무게를 알았다. 무엇으로도 메울 수 없는 깊은 구멍이 가슴을 움켜쥐었다. 숨이 멈춘다는 것은 단순히 생명이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한 세계가 통째로 사라지는 것이었다.

얼마 전, 늘 밝기만 했던 친구의 부고가 전해졌다. 건강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죽음은 더 이상 뉴스의 한 구절이 아니다. 문득 문을 열고 들어설지도 모르는 현실이 되었다. 삶이 얼마나 불안정하고 찰나인지를 뼛속 깊이 새기며 더욱 간절해진다.

아내가 12년의 병마와 싸워 이긴 지금, 하루하루가 선물처럼 소중하다. 완치라는 말을 들었지만, 죽음이라는 현실 앞에서 오히려 삶을 더 꽉 붙잡게 된다. 잃을 뻔했기에 더욱 소중해진 것이다.

이 순간 이어지는 아내의 숨결은 존재의 증표다. 단 하나의 리듬이 곁에 있음을 말해준다. 단순한 생리적 작용이 아니다. 귀 가까이 흐르는 이 울림은 말없이 전해지는 대화이고 서로의 시간을 잇는 고요한 다리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미세한 소리 하나가, 여기 있다고, 아직 당신 곁에서 함께 있다고 소리 없이 속삭인다. 이 작은 파동이 전하는 위안은 모든 언어를 넘어선다.

새벽빛이 창을 적실 무렵 숨결이 멎은 듯 조용해진다. 심장이 멈추는 듯한 찰나에 느껴지는 미세한 진동이 다시 세상을 돌려놓는다. 눈물겹도록 반가운 생의 귀환이다. 매일 밤 들려오는 조용한 숨소리가 주는 위로와 평온은 특별하다. 어머니의 마지막 숨결이 남긴 깊은 울림을 아내의 숨결을 통해 다시 느끼며, 차갑고 현실적인 시간 속에서도 작고 따뜻한 희망의 불빛을 붙잡는다.

잠든 얼굴을 바라본다. 오르내리는 가슴의 움직임, 잔잔한 파동이 뺨에 닿는다. 평온해 보이는 숨의 리듬 너머에 삶의 본질이 담겨 있다. 아내의 숨결 속에는 함께 걸어온 시간이 고스란히 스며들어 있다. 숨결을 들으며 삶의 무게와 아픔, 희망과 간절함이 얼마나 촘촘히 얽혀 있는지를 새삼 깨닫는다. 끝까지 곁을 지키는 마음은 고통마저도 나눌 힘이다. 함께 쌓아온 순간들이 숨결에 녹아 밤마다 숨소리를 들으며 고단한 현실 속에서도 위로와 다시 일어설 용기를 얻는다.

숨소리는 무언의 대화로 마음을 어루만지고 감싼다. 따뜻함이 잊지 말아야 할 삶의 의미를 일깨워주며 매일 밤을 지탱해 준다. 암흑 속에서도 가녀린 숨소리는 이어진다. 길 잃은 밤에 희미하게 번지는 불빛 하나가 되어 준다. 등불처럼, 나침반처럼, 이 리듬이 영혼의 길을 밝혀준다. 광활한 우주보다 더 깊은 의미가 작고 연약한 숨결 안에 있다.

매일 아내의 존재를 통해 삶을 다시 배운다. 죽음을 곁에 두고 생을 더 절실하게 껴안는다. 겨울이 끝나면 봄은 오고 어둠 끝에는 빛이 기다리고 있다. 마지막 순간이 닿을지라도 마음은 끝내 멈추지 않는다. 오늘도 숨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소리는 나직하고 작지만, 영혼을 일으킨다. 생의 리듬은 시가 되어 고요히 울린다. 화려하지 않아도 가장 빛나는 시다. 한 생을 흔드는 살아 있는 시다.

어둠 속 당신의 숨소리는 고통과 불확실 속에서도 매 순간을 영원으로 바꾸어 오늘을 살아 있게 한다. 삶이란 들숨과 날숨 사이를 건너는 여정이다. 그 여정을 함께 걸으며 말없이 곁을 지켜주는 것이 진정한 동행이다. 작은 숨결 하나가 차가운 방을 데우고 위태로운 마음을 다시 일으킨다. 숨은 밤의 모닥불이 되어 불안을 천천히 녹인다.

숨. 그것은 우리가 세상에 남기는 가장 원초적이면서도 가장 숭고한 서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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