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말을 걸던 순간
작가가 되고 싶었다. 오래도록 말하지 못했던 은밀한 속삭임이었다. 꿈은 내 삶의 어딘가에 소리 없이 깃들어 있었지만, 늘 일상에 밀려 먼 뒷자리에 서 있었다.
경영학을 전공하고, 직장 생활을 하며 필요한 만큼만 글을 썼다. 감정은 배제된, 목적과 의무를 위해 짜맞춘 문장들. 돌이켜보면, 글은 늘 타인을 위한 것이었고, 나를 위한 것은 아니었다. 때때로 서랍 속에 구겨 넣은 낡은 메모처럼, 그 시절의 글들은 내게 어떤 의미였을까. 부끄러움과 아쉬움이 교차하는 그 물음 앞에서, 나는 조용히 고개를 숙인다. 그것 또한 내 삶의 한 조각이었다는 사실만큼은 부정할 수 없다.
마음속엔 늘 다른 목소리가 있었다. 이름 붙이기 어려운 희미한 꿈. ‘글을 쓰고 싶다.’가 아니라, ‘글을 통해 나를 알고 싶다.’라는 갈망이었다. 세상의 평가나 화려한 성취가 아니라, 나라는 존재를 다정하게 들여다보려는 조용한 목소리였다.
아내는 그런 나를 지켜보며 거듭 권했다. 글을 써보라고, 단 한 줄이라도 좋으니 시작하라고. 나는 매번 ‘글쓰기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나 같은 사람이 쉽게 해낼 수 있을까?’라며 고개를 저었다. 어쩌면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없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세월은 사람을 부드럽게 다듬는다.
2022년 여름, 아내가 또 종용했다. 글쓰기 강좌가 있다고. ‘그래, 한 번 해보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작은 결심이 내 안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켰다.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연못에 떨어진 첫 번째 돌멩이처럼.
글쓰기 교실은 내가 상상하던 곳과 달랐다. 무언가를 가르치기보다, 안에 있는 것을 끌어내게 하는 곳이었다. 교수님의 짧은 강의가 끝나면, 수강생들은 자신의 글을 낭독해야 했다.
사람들 앞에 서서 내 글을 읽는다는 생각만으로도 심장이 귀까지 뛰어올랐다. 내 글이 얼마나 서툴지, 남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알 수 없어 손바닥은 땀으로 젖었다. 이상하게도, 바로 그 떨림이 나를 글 속으로 더욱 깊이 끌어당겼다.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무언가가 깨어나는 느낌이었다.
글은 단순한 정보 전달이 아니었다. 그것은 내 안을 비추는 맑은 거울이었다.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놓치고 살아왔는지를, 글을 통해 비로소 마주하게 되었다. 잊었던 어린 시절, 무심히 흘려보냈던 순간들, 사랑했던 사람들의 얼굴이 문장 속에서 서서히 살아났다. 글은 내 안에 쌓여 있던 먼지를 털어내고, 고요히 진실을 드러냈다.
때로는 쓰다가 손이 멈췄다. 쓰려던 말을 잃어버리고 멍하니 화면만 바라볼 때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내 마음속 한구석을 더듬었다. 아픈 기억까지 끌어안고 싶었다. 글은 나를 치유하는 느린 약이었다.
두 번째 수업에서, 어린 시절을 주제로 글을 썼다.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이야기였다. 초등 시절 사촌 형과 일어난 소심한 복수극과 얽힌 이야기들. 그런데 의외로 사람들은 내 글에 따뜻한 반응을 보였다. 고개를 끄덕이고, 그 시절을 회상했다.
그 작은 응원은 내게 하나의 확신을 심어주었다. ‘내 글이 누군가의 마음을 건드릴 수 있다.’ 그것은 세상을 향해 조심스레 내민 첫 번째 인사 같았다. 그날, 나는 처음으로 글을 쓴다는 것이 세상과 은밀히 손을 잡는 일임을 알았다.
그 후로 욕심을 부렸다. 더 깊이 쓰고 싶었다. 더 잘 쓰고 싶었다. 교수님의 교재를 읽고, 유명 수필가들의 작품을 찾아 읽었다. 책 속에서 만난 문장들은 거칠었던 내 문장들을 부드럽게 매만졌다. 글은 더 이상 나열이 아니라, 나를 다른 사람들과 연결하는 다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나를 쓸수록 나를 넘어서는 경험. 쓰는 이가 자신을 다 털어낸 뒤, 비로소 독자의 자리로 나아가는 여정이었다.
작가가 된다는 건 책 한 권을 내는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내 삶을 내 손으로 풀어내고 그 조각들을 누군가의 삶에 건네는 일이었다. 진심을 담은 문장은 어딘가에서 길을 잃은 누군가에게 작은 불빛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글을 쓰며 깨달았다.
글쓰기는 내게 점점 일이 아니라 숨이 되어갔다. 하루를 살아내듯, 글을 써야만 하루가 완성되는 삶.
나는 이제 막 시작했다. 아직 부족하고 서툴지만, 매일 한 걸음씩 걷는다.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느린 걸음일지라도 그 길 위에 내가 있다. 작은 메모 한 장이라도, 작은 기억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 애쓰며 쓴다.
오늘도 한 편의 글을 쓴다. 그리고 다시, 꿈꾼다. 처음 꿈이 내게 말을 걸었던 그날처럼.
먼 훗날, 내 걸음이 쌓여 하나의 길이 만들어질 때까지. 오늘도 조용히, 그러나 확실히, 나를 건너는 글을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