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할머니

사랑이라는 이름의 흔적들

by 가슴속호수

어머니 품에서 희미하게 배어 나오던 외할머니의 향기. 기억의 갈피에 스민 따스함은 시간의 더께 속에서도 바래지 않고 여전히 희미한 빛으로 남아 아른거린다.

외할머니의 미소는 희끗한 서리 내린 머리칼 사이로 잔잔히 번져 나온다. 시린 겨울 아침, 얼어붙은 손끝에 처음 와 닿는 햇살의 포근함이었다. 평생의 고단함이 깊게 팬 주름 위로도, 하얗게 센 머리카락은 오히려 청초하게 빛난다. 세상 온갖 시름을 짊어지고도 어찌 저리 온화한 표정을 지을 수 있었을까. 미소를 떠올릴 때면,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도 어김없이 품속 온기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다.

홀로 5남 1녀를 키워내신 분의 삶은 굽이진 산길 같았다. 투박하고 갈라진 손끝, 평생 땅을 일구느라 굽어버린 허리는 고단했던 세월의 훈장이었다. 안에는 쉬이 꺾이지 않는 단단한 심지가 있었다. 고된 농사일을 마치고 돌아와서도 쉴 틈 없이, 때 절은 행주를 빨고 군불을 지피며 분주히 움직이던 모습. 와중에도 손주를 향한 눈길에는 늘 따뜻함이 고여 있었다. 허락된 짧았던 시간 속 모든 몸짓은 기억 속에 박힌다.

네댓 살 무렵이었을까. 장난기만큼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던 시절, 말썽꾸러기 손주를 돌보러 오셨다. 잡으려는 손길을 피해 골목길을 휘젓고 다니다가 발을 헛디뎌 하수구 속으로 떨어졌다. 팔에서는 욱신거리는 통증이 느껴졌다. 뼈가 부러졌다.

어머니의 새파랗게 질린 얼굴과 함께 날 선 목소리가 외할머니에게로 향했다. “엄마, 애 좀 잘 보지 그러셨어요!” 아무 말 없이, 잘못한 것 하나 없음에도 미안함이 가득 담긴 눈으로 손주를, 딸을 번갈아 볼 뿐이었다. 변명 한마디 없는 침묵 속에서, 진정한 사랑이란 어쩌면 탓하기보다 묵묵히 끌어안는 것임을 어렴풋이 느꼈는지도 모른다.

선명한 다른 기억 하나. 여름날 쨍한 햇살이 쏟아지던 대청마루였다. 반질반질 윤이 나는 빈 통조림 깡통을 장난감 삼아서 놀다가, 아래로 떨어져 날카로운 모서리에 찍혀 오른쪽 눈가가 찢어졌다. 뜨끈한 피가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고, 울음보가 터졌다. 피투성이가 된 얼굴을 본 어머니는 이번에도 버럭 소리를 질렀다. “대체 애를 어떻게 보시는 거예요!”

이번에도 변명 대신,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와락 끌어안았다. 세상 모든 두려움과 아픔마저 녹여버릴 듯 따사롭고 폭신했던 품이었다. 눈가에 뚜렷하게 남은 작은 흉터는 세월이 흘러도 지워지지 않는, 무한했던 사랑과 희생의 거룩한 증표다.

어린 눈에는 흰 머리칼 한 올, 주름진 손끝 마디마디에 세상 모든 위로가 담겨 있었다. 새벽녘, 포근한 잠에서 깨어나 눈 비비며 품을 찾아 두리번거리던 순간들이 스쳐 간다. 언제나 곁에서 망설임 없이 따뜻한 정을 내어주든 존재를 너무도 당연하게 여겼든 무심함. 사랑의 크기와 깊이를 이제야 깨닫는 어리석음에 문득문득 서글픔이 밀려온다.

단지 말썽꾸러기 손주를 품에 안는 것만으로도 더없이 행복해 보이셨다. 품 안에서 세상 어떤 잘못도 용서받을 수 있다는 믿음, 대가 없는 사랑의 본질을 배웠다. 아무리 큰 말썽을 부린 뒤에도 눈빛 속에서는 언제나 넓고 깊은 이해와 용서를 발견할 수 있었다. 길 잃은 밤의 작은 등불처럼, 미소는 길을 밝혔다. 소리 없이도 가장 든든한 삶의 언덕이었다.

세월은 흘러 철없는 아이는 어른이 되었다. 모습은 기억 저편에서 아련히 떠오르는, 사무치는 그리움이다. 문득 고단해 보이는 어머니의 얼굴에서 표정이 겹쳐 보일 때면,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뜨겁고 아린 것이 울컥 차오른다.

이제 포근했던 손길을 직접 느낄 수는 없다. 다만, 기억 속에 새겨진 체온은 여전히 남아 추운 날들을 견디게 한다. 철없던 시절, 한없이 받기만 했던 사랑의 무게를 뒤늦게 깨달았을 때, 정작 손 한 번 제대로 잡아드릴 분은 곁에 계시지 않았다. 보답할 길 없는 먹먹함으로 남은 마음, 이것이 가장 애틋하고 서러운 그리움의 모양이다.

떠나고 난 후, 어린 날의 새벽이면 잠결에도 자꾸만 빈자리를 더듬으며 울음을 터뜨렸다. 어머니가 “외할머니 가셨어, 이제 안 오셔”라고 아무리 말해도 믿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방문을 빼꼼 열고 들어와 머리를 쓰다듬어 줄 것만 같았다. 기다림의 시간 속에서도 마음 한가운데 조용히 숨 쉬며 감싸안는 보이지 않는 체온이었다.

망아지처럼 천방지축 뛰어다니며 속만 썩이던 손주였지만, ‘우리 똥강아지’ 하시며 항상 엉덩이를 두드려 주었다. 부렸던 어리광과 철없는 장난들이 혹시 미소 지을 수 있는 따뜻한 기억으로 남아 있기를. 손주와 함께했던 짧은 시간이 부디 고단했던 삶 속에 작은 기쁨 한 조각이었기를 간절히, 또 간절히 바랄 뿐이다.

이제는 만날 수도, 만질 수도 없는 분을 생각한다. 그리움과 사랑, 때늦은 미안함이 뒤섞인 기억 속에 오래도록 잠겨본다. 빛바랜 사진첩 속 기억 같지만, 품 안에서 느꼈던 무한한 안정감과 포근함은 여전히 생생하게 살아 숨 쉬며 삶의 가장 귀한 흔적이 되었다. 세월의 풍파에도 변치 않는 굳건한 힘으로, 오늘도 넘어지지 않게 붙들어준다.

삶에 있어 사랑의 시작이었고, 지울 수 없는 그리움의 끝이었다. 아득한 끝자락에서 여전히 잔잔한 미소를 찾는다. 어둠 속에서도 길을 잃지 않도록, 미소는 삶에 꺼지지 않는 등불이 되어 갈 길을 오래도록 밝혀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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