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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슴속호수 Nov 05. 2024

구공탄, 가슴에 남은 사랑

인생 택시

 어머니와 지난날을 회상하며 이야기를 나누던 중, 선친과 함께 겪었던 고생스러운 시절을 떠올리셨다.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으며 말씀하셨다. “그건 단지 연탄이 아니었단다. 우리는 불덩이를 바라보며 서로 부둥켜안고 울고 웃으며 힘든 시절을 견뎌냈단다.” 그때, 연탄이 단순한 난방 도구가 아닌 가족의 추억과 정을 잇는 상징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로를 끈끈하게 이어주는 뜨거운 사랑의 기억이었다.


 새벽의 어둠이 짙게 깔린 시간, 아버지는 부엌 아궁이에서 연탄을 갈았다. 피어오르는 불꽃은 차가운 공기를 가르고 집 안 구석구석 온기를 퍼뜨렸다. 한겨울의 긴 밤에서도 불씨는 사그라지지 않았고, 하루를 밝히는 신호처럼 다시금 타올랐다. 


 매일 아침이면 지핀 불길은 온 가족을 따스하게 감싸며 하루를 살아갈 힘이 되었다. 불빛을 바라보며 고즈넉이 앉아 깊은 사색에 잠긴 아버지의 어깨에는 지난날의 여정을 닮은 고단한 그림자처럼 드리워져 있었다. 불을 다루는 손길에는 말없이 전해지는 사랑과 묵직한 삶의 진리가 녹아들어 있었다. 어떤 어려움에도 스스로 살아가는 법을 몸소 보여주셨다.


  1960년대 초, 내가 두세 살이었을 당시 겨울은 유난히 매서웠다. 부모님은 작은 연탄 가게를 운영하며 손수레에 가득 싣고 험한 언덕을 하루에도 몇 번씩 넘으셨다. 눈이 쌓여 발걸음조차 무겁던 비포장 길에서도, 눈보라가 몰아쳐도 배달을 멈출 수 없었다. 연탄은 가족의 생계를 지탱하는 생명줄이었다. 팔지 않으면 추위뿐만 아니라 굶주림까지도 우리를 덮쳤을 것이다. 이는 단순한 난방 도구가 아니었다. 고단한 현실 속에서 우리 곁을 지켜주던 동반자 같은 존재였다.


  밤새 눈은 멈추지 않고 내렸고 다음 날까지도 계속되었다. 이날 언덕 위 마지막 집에 배달하던 중, 손수레 바퀴가 깊은 눈 속에 빠져 더는 움직일 수 없었다. 나는 어머니 등에 업힌 채 찬바람 속에서 울음을 터뜨렸고 울음은 좀처럼 그치지 않았다. 부모님 심정은 끝이 보이지 않는 깊은 어둠 속으로 가라앉는 듯했을 것이다. 


 그때 멀리서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가 도와드릴게요.” 주문한 집주인이었다. 그는 눈보라를 헤치며 다가와 묵묵히 삽질하며 길을 내주었다. 삽질 하나하나에는 온정이 담겨 있었다. 그것은 부모님 마음속에 희망의 불씨로 오래도록 남았다. 이 순간의 따뜻한 도움은 우리 가족이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새벽마다 어김없이 불씨를 살피셨다. 두터운 손에 남은 것은 그을린 재뿐만이 아니었다. 가족을 위해 흘린 땀과 견뎌낸 시간의 흔적이 고스란히 새겨져 있었다. 어머니에게는 연탄에 손을 대지 못하게 하셨다. 아버지의 깊은 사랑이 담긴 무언의 표현이었다. 배달을 갈 때 어머니는 손수레를 뒤에서 밀어주셨지만, 도착하면 손수레를 지키기만 하셨다. 연탄 저장고까지 나르는 일은 홀로 감당하셨다. 날씨가 좋을 때는 혼자 배달을 다녀오셨다. 집 안 아궁이에 불을 지피는 일 역시 묵묵히 도맡으셨다. 아버지의 세심한 배려로 어머니 손은 돌아가시는 그날까지 분결같이 희고 붓끝같이 고운 손을 지니셨다. 사랑은 말없이 전해졌고, 자연스레 보고 배우며 내 가슴속에 깊이 새겨졌다.


  찬바람이 창문을 두드리던 어느 날, 아궁이에서는 곰국이 보글보글 끓었다. 부엌 가득 퍼진 구수한 냄새가 방 안까지 흘러들어왔다. 오 남매는 숟가락을 입에 물고 군침을 삼켰다. 곰국 한 그릇에는 어머니 사랑만큼이나 고기가 듬뿍 들어 있었고, 뜨끈한 국물을 한 숟가락 떠먹으면 온몸이 절로 녹아내렸다. “이런 날엔 뜨거운 국물이 최고지.” 어머니의 말 속에는 가족의 소소한 행복을 품고 있었다.


  주말이면 아버지는 낚시를 가시는데 금요일 밤이면 낚시 준비로 분주하셨다. 그럴 때면 우리는 아궁이 곁에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오늘은 특별한 요술을 보여주마.” 하시며 불을 다루는 모습을 숨죽여 지켜보았다. 불꽃 속에서 납이 녹아 크기별로 봉돌이 만들어지는 장면은 어린 마음에 마법처럼 신비롭게 다가왔다. 연탄불을 통해 삶의 지혜를 전해주셨다. 추억은 지금도 살랑거리는 미풍에 실려 온화하고 인자한 아버지의 음성으로 내 마음 깊숙이 스며드는 듯하다.


  연탄은 우리를 따뜻하게 감싸주고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던 고마운 존재였지만, 언제나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초등학교 4학년 겨울, 별채에 살고 있던 사촌 형 방에서 놀다가 함께 잠들었던 기억이 떠오른다. 형이 연탄을 갈고 나서 환기를 제대로 하지 않아 방 안에 연탄가스가 서서히 퍼졌다. 만약 아버지가 새벽 일찍 발견하지 못했더라면, 형과 나는 아마 다시 깨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다행히 병원으로 일찍 옮겨져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이 일 이후로 더욱 세심하게 아궁이를 관리하셨다.


  시간이 흐르며 도시가스와 기름보일러가 보급되면서 구공탄은 점차 사라졌다. 아궁이의 불씨가 사라졌지만, 겨울바람이 불어오면 아버지의 사랑으로  아궁이에서 피어오르던 온기가 자연스레 떠오른다. 여전히 열기는 내 가슴 한편에 남아, 삶의 깊이를 일깨워 준 소중한 가르침으로 자리하고 있다.


  이제 그 온기를 가슴에 새기고 길을 걸어간다. 아버지가 지펴주셨던 작은 불꽃을 기억하며 나도 누군가에게 따뜻한 빛을 전해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싶다. 이는 내 삶의 이정표가 되어, 다른 이들에게도 사랑의 온기를 나누는 길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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