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의 기억들
여름엔 차가운, 겨울엔 따뜻한. 봄과 가을엔 그 둘 사이에서 방황하다 결국엔 살갗에 닿는 공기의 느낌대로 선택하게 되는 것. 그러다 문득 “아! 이제 가을이 오려나 봐” 하고 혼잣말을 하며 계절의 변화를 알아차리게 해주는 것.
커피.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매일 아침 커피를 마시며 하루를 시작한다. 그런 나를 보며 동료는 내게 가장 맛있는 커피가 무엇이냐고 물어보았다. 왠지 그 물음에 무슨 무슨 풍미가 나는 어느 나라에서 생산된 커피라고 말해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그 많은 종류의 커피를 알지도 못할뿐더러, 설령 알고 있다 해도 그중에 내가 좋아하는 커피는 없었다. 그보단 시간이 없었거나, 커피가 없었거나, 혹은 다른 이유 때문에 시간이 지난 후 한참 만에야 마시는 커피가 나에게는 가장 맛있는 커피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떨 땐 커피를 앞에 두고도 그 맛을 느끼려 일부러 참았다가 마시는 경우도 있었다. 그처럼 내 곁에는 늘 커피가 있었다. 그리고 지금도 생각나는 몇몇의 기억들과 함께.
# 기억 하나. 순정이 담겼던 커피
군 복무 시절. 우리 소대 김 병장은 부대 근처 다방에서 일하던 그녀와 사귀고 있었다. 적어도 한 달에 한 번이면 그녀는 부대로 찾아와 김 병장의 면회를 신청하곤 했다. 어느 날인가는 나도 외출할 기회가 생겨 김 병장과 그녀와 함께 커피를 마신 적이 있었다. 선한 눈매로 김 병장 곁에서 홀짝홀짝 커피를 마시던 그녀는 그를 진심으로 좋아하는 것 같았고, 그에게 좋은 사람이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그 뒤로도 그녀의 면회 신청은 계속되었고 거꾸로 매달아도 국방부 시계는 돌아간다는 말처럼 여름을 지나 가을의 초입에 들어서던 어느 날. 그날은 우리 부대 전체가 야외 훈련이 시작되는 날이었고, 그날 김 병장은 말끔한 군복에 한껏 멋이든 모자를 쓰고는 군 생활을 마치며 전역을 했다. 나를 비롯한 우리 소대원들은 큰 훈련이 시작되던 날 전역하는 그를 부러워했고, 그래서였는지 그가 떠나던 날 시작된 훈련은 나의 군 생활 중 가장 힘든 훈련으로 기억이 되었다. 2주 뒤 우리는 무사히 훈련을 마치고 복귀를 했고, 그로부터 며칠 후 우리는 안타까운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그것은 김 병장에게 면회를 오던 그녀에 대한 소식이었다.
전역을 하면 김 병장은 그녀와 결혼을 하겠다고 했지만, 전역 후 그는 의도적으로 그녀를 피했고, 그 사실을 알게 된 그녀는 배신감과 상실감에 몇 날 며칠을 울며 지냈다고 했다. 그리고 너무도 평범하여 아무 일도 없을 것 같던 날. 그녀는 누구도 모르게 어디론가 떠났다고 했다. 다방 여주인은 그녀를 백방으로 찾았지만 소용이 없었고 그녀가 그를 찾아갔는지, 다른 어딘가로 떠나갔는지는 아무도 모른다고 했다. 그 후 우리는 김 병장의 소식도, 그녀의 소식도 들을 수 없었다. 오직 그녀가 일했던 다방만이 주말이면 군인들로 북적거리는 작은 마을을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가물가물 할 만큼 오래된 일이지만 이제는 찾아보기 힘든 아무도 올 것 같지 않은 낡은 다방을 볼 때면 그때의 기억이 떠오르곤 한다. 김 병장의 커피는 달콤함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을 것이지만, 그녀의 커피엔 그를 향한 순정이 가득했을 것이다. 그와 함께할 삶을 꿈꾸며 그의 전역을 누구보다도 간절히 기다렸을 것이다. 결국 그 기다림은 쓰디쓴 커피처럼 슬픔이 되어 버렸지만.
# 기억 둘. 할머니의 커피
생전에 나의 외 할머니는 홀로 시골집에 살고 계셨다. 그래서 방학이 되면 할머니를 뵈러 외갓집을 가곤 했다. 어느 해 여름방학도 마찬 가지였다. 외갓집에 도착하기 전 할머니께 전화를 걸어 필요하신 게 무엇인지를 여쭤 보았다. 여느 때처럼 필요한 것을 하나하나 말씀하시던 목록 중엔 뜻밖에 커피가 있었다. 할머니는 봉지에 그려진 그림까지 설명하시며 꼭 그 커피를 사 오라고 하셨다.
할머니는 내가 도착 하자 무척이나 좋아하셨고 당장에 냄비에 물을 끓이셨다. 다 끓여진 물은 커다란 양은그릇에 부어졌고 할머니는 커피 여러 봉을 넣으시고는 찬물과 얼음을 섞어 시원한 커피로 만드셨다. 그런 다음 커피가 담긴 커다란 그릇과 작은 사발과 함께 커피를 내어 오셨다. 먹는 법은 간단했다. 작은 사발로 커다란 그릇에 담긴 커피를 양껏 떠 마시면 되는 것이었다. 얼음이 동동 떠있는 커피를 할머니는 사발로 떠 맛있게 드시곤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홀로 계셨던 할머니는 누군가와 함께 하고 싶었던 마음을 커피로 대신하셨던 같다. 사람들이 커피를 마시며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거나 때로는 외로운 마음을 스스로 위로하거나 하는 것처럼 말이다. 반짝반짝 빛이 나는 양은으로 된 사발과 그 안에 담긴 커피는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지만 할머니의 커피는 맛있었고 시원했다. 그리고 이제는 곁에 계시지 않는 할머니가 더욱 그립고 보고 싶다. 스위치만 누르면 금세 물이 끓는 포트와, 손잡이가 달린 예쁜 컵을 사드리지 못했던 것이 아쉽기만 한 채.
오늘, 그리고 지금 이 순간도 사람들은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를 한다. 그중 누군가는 떨리는 마음으로 첫 만남을 가질 것이고, 또 누군가는 눈물을 흘리며 이별을 할 것이다. 마음이 우울했던 이는 우연히 들려온 사람들의 이야기에 세상 사람들 삶이 모두가 비슷하구나 하며 힘들었던 마음을 추스르기도 할 것이다. 그처럼 커피는 쓴 맛과 단 맛이 오묘하게 섞인 맛을 내며 우리들의 사연과 함께 한다. 김 병장을 좋아했던 순정 가득한 그녀가 있던 시절과, 시원한 커피를 양은그릇에 떠 맛있게 드시던 나의 할머니가 계셨던 그날처럼.
오늘 아침도 나는 커피를 마시며 하루를 시작한다. 투명한 창 너머론 축축함이 사라진 바삭한 볕들이 쏟아지고 있다. 그 볕들이 반가운 것을 보니 이제는 조금씩 새로운 계절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하나 보다. 지금은 알 수 없지만, 그래서 언제 일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언젠가는 그리워질 풍경을 만들기 위해. 물론, 커피도 함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