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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llein Nov 22. 2020

가을을 보내는 마음


시월 마지막 날. 이용의 잊혀진 계절을 듣지 않았다. 노래를 듣는다면 정말 계절을 잃어버려 겨울이 가을을 성큼성큼 차지할 것 같아서였다. 가을은 늘 쓸쓸하지만 이번 가을은 마음에 구멍이 몇 개는 더 있는 것 같다. 올해 슬픈 일이 많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슬픔이 가시기 전 매형이 돌아가셨다. 매형은 아버지 상중 줄곧 내 옆에서 함께 문상객을 받아 주셨다. 살아온 날 동안 몇 번 마주하지 못했던 매형이었지만, 매형과 있는 동안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좋은 사람이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어릴 적 윗집 사는 형이 좋아 마냥 쫓아다녔던 것처럼 매형을 따르고 싶었다. 하지만 그처럼 좋아지던 사람이 지금은 없다. 떨어져 지낸 날이 많아 금세 잊힐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렇지가 않다. 선한 얼굴. 착함이 묻어나는 목소리. 자꾸만 생각난다.



얼마  어느 개그우먼이 세상을 떠났다는 기를 들었다. TV에서만 보았을 뿐 한 번도 만나본적은 없지만 영리하고 반듯한 성품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그녀가 스스로 생을 저버렸다. 마음이 숭숭거리고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올곧은 소신과 떳떳한 마음. 그것만으로는 삶은 버틸  없을 만큼 가혹한 것일까? 그녀는 생을 이어갈  하나의 희망도 없었던 것일까? 서쪽 하늘을 보았다. 밤이 오기  하늘이  세상을 사랑할 것처럼 핑크 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이제는 더 이상 그녀가 아름다 하늘을 볼 수 없다고 생각하니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  한 번이라도, 그녀가  하늘을 보았다면 어땠을까?



뜨거운 사막 한 복판에 있는 나무처럼 화초가 말라있었다. 화초는 잎을 늘어 뜨리고 마른 몸을 보이며 고통스럽다는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화초에게 신호는 삶을 위한 희망이었을 터. 희망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세상에는 다양한 차이가 존재한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살아 있다는 전제 하에서만 가능한 것. 화초는 살아 있기에 고통을 겪고, 살아 있기에 물을 빨아들여 행복해할 것이다. 그처럼 고통도 행복도 살아 있어 느낄 수 있는 것. 모든 근원은 삶인 것. 그 삶을 위해 나는 미안한 마음으로 화초에 물을 주었다.



장례식에 갔다. 사람들이 고인의 영정 앞에서 명복을 빈다. 누군가는 눈물을 떨구고, 누군가는 되돌릴  없는 공허 앞에서 꽃을 놓고 묵념을 하고 향을 피우고 절을 한다.  모든 것이 끝나면 그들 앞에는 어김없이 음식이 차려진다.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살아있는 자들의 특권.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곳에서 그들은 생각한다. 언젠가는  있을 일인데도 자신의 죽음은 있어서는   일이라고. 누군가의 죽음 앞에서 해서는   생각이지만 이기적인 것만은 아니다. 그들이 죽음을 거부하는 마음은 삶은 생명에 대한 애착으로 살아간다는 증거이며,  애착을 향한 몸짓은 아름다운 계절이 소멸될 것을 알면서도 보내지 않으려는 안감힘 같은 것이다.

 


바람이 차가워진다. 떠나는 가을을 바라보는 마음도 차갑다. 보고 싶지만 볼 수 없는, 이야기하고 싶지만 이야기할 수 없는 사람들이 스친다. 소멸을 앞둔 가을은 아름다운데 그립고 슬프다. 내일이 되면 내일의 마음이 쌓이고 또 다음 날이 되면 그날의 마음이 쌓이겠지. 그리고 겨울이 오면 겹겹이 포개진 그리움을 안고 차가운 하늘 향해 입김을 불겠지. 러면 나의 온기가 섞인 입김이 콧속이 찡할 만큼 냉기 가득한 허공에 하얗게 퍼지는 것을 보며 희망이라는 것을 생각하겠지.  희망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는   없지만,   거라는 잘되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휑하고 공허하지만 그렇지 않은 날도 있을 거라는 염원 같은 것을 생각하며. 잠을 자고 밥을 먹고 일을 하고 그리운 사람을 잊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비록 이루어질  없는 사실일지라도, 나에게는 우리에게는, 소멸은 오지 않을 거라는 희망을 확신하며 살아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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