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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llein Feb 27. 2022

그리움의 소임

그리움은 힘을 준다.

해도 해도 끝이 없는 것이 군대 이야기이다. 이야기에는 대부분 MSG가 첨가된다. 듣는 사람도 그 사실을 알지만 심증뿐이다. 함께 군 생활을 했던 사람이 옆에 없는 한 이야기의 진실 여부는 말하는 사람 자신밖에 모른다. 나도 에피소드가 다. 이야기를 해보라 하면 몇 시간을 이야기할 수 있다. 다양한 장소, 다양한 상황, 다양한 인물들이 나오는 이야기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을 생각해보면 역동적이거나 극적이지 않다. 믿어야 하나 싶을 만큼 허무맹랑하지도 않다. 누군가에게는 스쳐가도 모를 길지 않고 무심하게 평범했던 어느 한때의 이야기이다.

 

이등병을 막 벗어나 갓 일병이었던 3월의 요일이었다. 그날 우리 소대는 여느 때처럼 한주 마무리를 위해 내무검열 준비를 했다. 청소가 끝나자 분대장은 개인위생 검열을 위해 손톱을 깎으라 했다. 이등병들과 일병들 중대 막사 처마  벽에 기대앉아 손톱을 깎았다. 리들 옆에는 며칠 후 전역을 앞둔 옆 소대 말련이 라디오를 듣고 있었다. 그에게 라디오에서 나오는 악과 감미로운 디제이의 목소리는 며칠 후면 맞이할 세상의 소리였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자유롭게 넘어갈 수 없는 울타리 밖 세상의 소리였다. 리가 할 수 일이라곤 악이 나오는 세상을 동경하며 하늘을 보는 것이었다. 


화창한 하늘에는 봄볕이 가득했다. 볕은 우리가 있는 처마 밑으로 내려와 겨우내 눅눅했던 마음에 닿았다. 기분이 좋았다. 또각또각.  옆 소대 사람들도 합세해 여기저기에서 손톱 깎는 소리가 났다. 손톱 깎는 것을 끝낸 사람 자리를 뜨지 않았다. 군대가 아니었다면 다들 고만고만한 또래인 친구 같은 사람들. 우리는 자리를 뜨지 않고 봄 햇살을 즐겼다. 햇살은 반짝였고 여유로웠다. 잠시 후면 숨 막히는 내무검열이 시작될 것이다. 관물대 위, 액자 위, 창틀, 보이지 않는 구석 어디든 먼지가 나와서는 안된다. 검열자의 손에 먼지가 묻다면 토요일 오후의 휴식은 없을 것이다. 지적을 당하지 않으려면 빨리 내무반에 들어가 마지막 점검을 해야 한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선임들은 내무반으로 들어가라는 눈치를 주지 않았다. 우리는 눈을 찡그려 봄볕을 보았다. 비록 잠깐이지만 다가올 두려움 때문에 한가한 봄의 따스함을 포기할 수 .


전역 후 오랜 시간이 흘렀다. 예비군도 민방위도 언제 끝이 났는지 가물거다. 얼굴에는 주름이 생기고 뱃심 없는 사람처럼 키도 조금 줄어든 것 같다. 그러나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손톱이 자라는 것이다. 손톱이 키보드 치는 것을 방해할 만큼 자라면 손톱깎기를 집어 다. 그리고 오래 전의 기억을 떠올려 따사로운 볕과 한가로움을 찾아보지만 잘 되지 않는다. 볕도 마땅치 않고 옹기종기 모여 앉은 또래의 사람들도 없다. 동경이 가득한 라디오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구속되고 억압된 마음도 없다. 적당한 자리를 찾기 위해 두리번거리지만 마땅치 않다. 알고 있다. 기억 속 상황은 그때만의 고유한 상황이라는 것을. 울타리 밖으로 마음대로 갈 수 없는 상황과 통제에서 벗어나고픈 마음이 아니라는 것을. 그 사실을 아는데도 포기할 수 없다. 이게 다 그리움 때문이다.


그리움 없는 사람은 없다. 사람들마다 보고 싶고 느끼고 싶고 고 싶은 것들이 있다. 그립다는 것은 무언가를 가슴에 묻고 사는 것이어서 슬퍼 보인다. 슬퍼하는 이유는 그리운 대상을 만나지 못할 것이라는 염려 때문이다. 그러나 염려를 버리고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리움은 희망이 된다.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것이 세상이다. 운이 좋아 당장이라도 그리움의 대상이 다가올 수 있다. 하지만 만나지 못한다 해도 실망하지 말아야 한다. 다시 그리워하면 된다. 남아있는 생동안 그리워하는 것을 만나기를 희망하며 살아가면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힘을 내야 한다. 살아야 만날 수 있으니 살아갈 힘을 내야 한다. 그리움은 근원이 과거임에도 내일을 맞이해야 할 이유다. 손톱을 깎다 아주 오래 전과 똑같은 봄 볕을 맞으 행복해할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다면 언젠가는 그날이 올 거라는 희망을 가질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힘을 내야 한다. 이것이 그리움의 소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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