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가에서 배우는 영혼의 영원한 여정
안녕하세요 구독자님, 마디예요.
저는 지금 비행기 탑승을 기다리며 이 글을 마무리 하고 있습니다. 독일 시할아버지 장례식에 가는 길이거든요. 지난 몇 달 간 심장이 안좋으셔서 얼마 전에 뵈었을 때 마지막일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할아버지의 손을 꼬옥 잡아드렸는데, 정말 그것이 마지막이 되어버렸습니다.
죽음, 요가레터에서 언젠가 다루고 싶었던 주제였는데 그 시간이 찾아온 것 같아요.
요가 철학에서는 죽음에 대해 어떻게 바라볼까요? 요가를 수련하는 우리는 가까운 이의 죽음을 어떻게 잘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마지막으로 우리는 스스로의 죽음을 어떻게 잘 준비할 수 있을까요?
구독자 님은 죽음을 자주 생각하시나요?
죽음이 두렵나요, 아니면 여한이 없이 떠날 준비가 되었다는 생각이 드나요?
저는 인구가 아주 적은 독일 시골에 산 적이 있어요.
그 때 저는 장을 보러 마을교회 옆의 공동묘지를 자주 지나 다녔습니다. 그 길이 슈퍼에 가는 가장 빠른 길이었는데 정원처럼 예쁘게 관리가 잘 되어 있었거든요. 그래서 무섭지는 않았지만, 매일 묘지를 지나며 비석 속에 새겨진 죽은 사람의 이름과 생몰년도를 보다보니 자연스럽게 저와 제 가족의 죽음을 생각하게 되더군요.
그 시골 묘지는 나의 삶도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삶도 언젠가 다 끝난다는 것을, 태어난 순서대로 죽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자주 상기시켜주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사촌오빠의 부고를 받았습니다.
계곡으로 물놀이를 갔는데 떠내려가는 아기튜브를 건지려다 사고가 났다고요. 오빠를 마지막으로 본 건 불과 몇 개월전, 저희 집까지 데려다주며 차에서 환하게 웃는 얼굴이었습니다. 마흔도 채 되지 않은 오빠의 죽음으로 저는 불안함, 조급함, 허무함, 미안함, 그리고 두려움을 동시에 느꼈습니다.
죽음에 대한 공포는 제대로 살지 못했다는 감정, 다시 말해 기쁨도 의미도 없는 삶을 살았다는 감정과 함께 자라난다. 진정으로 사는 사람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존재와 내면 활동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때문이다. (...) 여러 종교의 위대한 인문주의 사상가들은 모두 입을 모아 말한다. 온전히 살지 못하는 사람, 자기 자신으로 가득차지 못하는 사람이 가장 죽음을 두려워한다고, 자아를 초월한 사람은 실제로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는다고 말이다. / 에리히 프롬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 5. 죽음에 대한 태도
애도 과정에서 아침마다 매트에 서는 습관은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아침에 아사나와 프라나야마를 집중적으로 수련하면서 저는 조금씩 마음을 가라앉혔어요. 그저 이 찰나 같은 삶을 하루 더 살 수 있기를 바라게 되었고 세상에 당연한 건 없다는 사실을 마음 깊이 이해하기 시작했지요. 매일 죽음을 생각하다보니 역설적으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오늘 하루를 감사하게 사는 것 뿐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이의 눈을 더 자주 더 오래 들여다보고, 그 목소리에 귀 기울여주었어요.
죽음이라는 닻을 제 안에 깊이 내릴 수록 저는 더욱 생생하게 삶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요가 철학에서는 육체와 영혼을 개별적으로 봅니다.
우리의 육체는 물질적인 존재라 죽고 부패하지만, 진정한 본질인 영혼은 영원히 살아있다고 생각하지요. 죽으면 영혼은 몸을 떠나 다음 집과 다음 모험을 찾습니다. 몸은 물질로서 분해되어 지구에서 재활용됩니다.
요가 철학에서 영혼은 생과 생 사이, 즉 삼사라 속에서 계속 존재합니다. 요가에서 죽음은 아주 중요한 주제로, 죽음에 대한 이 인식이 제대로 닦이지 않으면 다른 모든 수행은 쓸모가 없다고 말할 정도예요.
삼사라라는 말은 '흐르다'라는 뜻으로 한 순간에서 다음 생애로, 한 생애에서 다음 생애로 의식의 흐름이 '흐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든 요기의 목표는 윤회와 업보가 계속되는 이 순환에서 궁극적으로 벗어나 해탈(Moksha, 불교에서는 Nirvana)이나 깨달음(Samadhi)에 도달하는 것이예요. 왜냐하면 이 순환 속에 갇힌 이상 모든 인간은 질병, 늙음, 사랑하는 이의 죽음으로 인해 계속 고통받을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바가바드 기타는 죽음을 철저하게 분석해서 죽음에 대한 인식을 바꾸도록 도와준다. 우리가 백년을 산다면, 베다의 관점으로는 50살까지만 늙고 50살 이후에는 점점 젊어진다. 새로운 생에 가까워지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윤회에 대한 믿음이 있다면 죽음은 끝이 아니다. 내 행위 하나하나가 업으로 쌓여 다음 생의 미탸트만(육체적 자아)을 결정짓거나, 혹은 행위로 업을 소멸시킬 수 있다. 파탄잘리 무니 다스 『깊게 읽는 바가바드 기타』 제1장 11절
요기들은 이렇게 영혼의 불멸을 달성하기 위해 요가 수련을 발전시켰습니다. 그리고 해탈에 이르른 영혼은 다시는 물리적인 형태를 취하지 않고, 세상 모든 존재에 스며들어 편재하게 된다고 믿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모두 연결되어 있다고, 나마스떼- 당신 안의 신성에 인사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거쳐 간 모든 사람의 영혼은 항상 우리의 일부로 남아 있으니깐 말이죠.
요기들은 윤회를 통해 영혼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에 대해 너무 슬퍼할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우리의 머리로는 이해할 수 있는 말이지만 막상 죽음이 닥쳐오면 슬퍼하지 않기란 정말 힘든데요.
내가 존재하지 않았던 때란 없으며, 사람을 다스리는 자들도 그들이 존재하지 않았던 때가 없느니라. 또한 우리는 앞으로도 영원히 존재할 것이니라. 바로 이 몸에서, 몸을 입을 이 영혼이 소년기, 청년기, 노년기를 거치듯 그렇게 또 다른 몸으로 들어가거니와, 그런 까닭에 어진 이는 죽음을 슬퍼하지 않느니라.
『바가바드 기타』 2장
젊은 시절의 아엥가와 라마나니 ⓒ Google Arts & Culture
아엥가 요가를 창시한 B.K.S 아엥가 역시 평생을 함께 한 아내 라마나니가 세상을 떠났을 때에 대해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영혼은 신성하고 비물질적이며 완전하고 영원하다. 다시 말해 그것은 죽지 않는다. 죽지 않는 것을 발견하라. 그러면 죽음의 환영은 가면이 벗겨질 것이다. 이것이 죽음의 정복이다. 이것이 엄청난 고통에도 불구하고 내가 아내의 죽음 때문에 울부짖지 않았던 이유다. 나는 환영을 위해 울지는 않을 것이기에
B.K.S. 아엥가 『요가 수행 디피카』
삿구루는 우리가 죽음이 삶의 일부라는 사실을 자주 생각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고 말해요.
그리고 우리가 사랑하는 누군가의 몸이 구원받을 수 없을 정도로 부서졌다면, 그들이 우아하게 죽을 수 있게 보내주어야 한다고 말하지요. 우리가 그 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에 어떻게든 이 지구에 남을 수 있도록 다양한 노력을 하겠지만, 일단 그 생명이 떠나기로 결정한 후에는 그것을 존중하는 법을 배우라고요.
이는 사랑하는 이의 마지막 순간에도 해당되지만 우리 스스로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존엄한 마음으로 탄생, 졸업, 결혼 등을 축하하듯 죽음을 잘 준비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할까요.
요가를 수련하는 것은 타인의 죽음을 애도하는 동안 슬픔을 완화하는 데도 도움이 되지만 실제로 나의 죽음을 위한 훈련을 시켜주기도 합니다. 죽음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라는, 요가 철학의 가르침을 일상에 적용해 볼 수 있는 몇 가지 방법을 소개해 볼게요.
고대 인도인들은 기원전 12세기 무렵에 호흡을 통해 생명의 에너지 '프라나 prana' 를 인지했다고 합니다. 호흡한다는 것은 아직 살아있다는 것이지요. 아사나 수련 앞뒤로 프라나야마 수련을 더해보시길 추천합니다. 그리고 들숨과 날숨의 흐름, 복부의 움직임에 집중하며 생명의 에너지, 지금 살아있음을 느껴보세요. 이렇게 의식적인 호흡 실천은 불안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나의 의도와 상관 없이 일어나는 일을 감정의 동요없이 바라볼 수 있도록 도와줄 것입니다.
저는 매일 눈 뜨면 죽음을 떠올립니다. 글로 적고보니 조금 이상하게 들릴 수 있지만, 정확히는 '(자는 동안 안 죽고) 오늘이 또 주어졌네' 하고 감사하게 된 것이에요. 햇빛이 눈에 들어오자마자, 생명을 인지하고 감사하려고 노력해요.
매일 죽음을 떠올려보세요, 그리고 감사하는 연습을 해 보세요.
저는 이 과정에서 제 인생에서 진짜 중요한 것을 걸러낼 수 있었습니다. 무엇을 하고 누구를 만날지에 대해 더 의식적인 선택을 할 수 있었죠. "생명=시간=가치" 라는 생각이 깊게 박히니, 돈 역시 나의 시간과 에너지를 치환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더욱 현명하게 다루게 되었구요. 나쁜 일이 생기면 그 일에 감정을 100% 다 쏟기 보다 한 발짝 떨어져서 생각하고 지나가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하게 됩니다.
“평상시 죽음을 인지하면 삶의 선택지가 간결해집니다. 죽음이 한 달 남았다고 생각해 보세요. 절실한 일에 몰두하며 일주일을 살겠죠. 일의 경중이 저절로 나눠질 겁니다. 남을 해치거나 나쁜 일을 할 수가 없어요. 누군가를 미워할 시간조차 아깝거든요.” 정현채 '죽음학' 교수
미리 유언장을 쓰는 것도 좋습니다.
웰다잉 전문가들에 의하면 장례식은 어떻게 치렀으면 좋겠는지, 연명치료, 장기기증, 유산 처리에 관한 나의 생각을 미리 문서화해두면 도움이 된다고 합니다. 이런 준비는 삿구루가 말하는 '우아한 죽음을 존중'하는 것과도 연결됩니다.
핵심은 ‘내 뜻대로 결정하는 것’입니다. 연명치료를 받을지 말지, 장기 기증을 할지 말지, 장례 절차를 어떻게 할지, 재산을 어떻게 정리할지 등에 대해 미리 정해놓는 게 중요합니다. 그걸 미뤄두면 연명치료는 병원이, 장례 절차는 장의사가 결정하고, 유산에 대해서는 법원이 개입하게 됩니다.” 원혜영 웰다잉문화운동 공동대표
사바사나는 이 글을 읽고 계신 구독자 님을 포함한 아마 모든 요기가 좋아하는 자세일텐데요. 길든 짧든 아사나를 끝내고 몸의 모든 긴장을 풀며 숨을 내쉬는 이 사바사나를 조금 더 의식적으로, 이름 그대로 죽음을 떠올리며 수련해보세요. 이 자세는 죽음을 준비하는 자세입니다.
수련 후 몸에서 분리 된 우리 영혼의 존재를 느껴보려고 하는거죠.
손바닥이 위로 향하게 어깨를 열고 심장과 폐를 위한 공간을 만듭니다.
눈은 감고 턱은 살짝 내리세요. 얼굴에 남아있는 긴장도 모두 풀어냅니다.
발톱 끝에서부터 정수리 끝까지,구석구석 내 몸을 가만히 훑어보는 바디스캔 연습을 하는 것도 추천합니다.
우리는 조금 이상한 시대를 살고 있어요.
죽은 자의 몸은 빠르게 수습되어 눈에 안보이게 멀리 떨어진 곳으로 옮겨지고, 장례는 눈코뜰새 없이 빠르게 치러지죠. 대도시에서 바쁜 일상을 살다보면 애도하는 마음은 오갈 데 없어지기 십상입니다. 그렇지만 죽음은 우리 모두가 맞이할 자연스러운 과정입니다. 요가 철학은 우리가 이 인생의 마지막 챕터를 조금 덜 힘들게 받아들일 수 있는 지혜를 전해준다고 생각합니다.
마침 제가 좋아하는 한 작가님께서도 이번 주에 할아버지를 하늘로 보내시고 죽음에 대한 글을 쓰셨더군요. 그의 글을 공유하며 오늘 요가레터를 마무리해 봅니다.
하얀 재가 된 할아버지를 보면서, 삶이란 참 덧없는 것 같다가도, 그 앞에 모인 친척들을 보면서, 삶이 남기는 것이 하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삶은 사랑을 남긴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사랑을 주었다면, 그 사랑은 남아서 그를 살아가게 한다. (...) 나중은 없다. 오늘 삶을 사랑하고, 받은 사랑을 기억하며, 사랑을 주어야 한다. 삶이란, 사랑이 없다면 아무것도 아니다. 작가 정지우
구독자님, 오늘도 계신 곳에서 삶을 만끽하며 사랑하는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