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기억, 추억, 낭만적 순간

낭만에 대하여

by om maum Mar 06. 2025

나는 ‘낭만’이라는 단어가 예전부터 좋았다.  겉으로 드러나는 화려함이 아니라, 속 깊은 멋스러움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퇴근길, 신호를 기다리다 문득 하늘을 올려다봤다. 발갛게 물든 저녁노을과 차에서 흘러나오는 내 플레이리스트가 절묘하게 어우러졌다. 나도 모르게 혼잣말을 했다.

"와, 낭만 죽이네!"

그 짧은 순간이 평범했던 하루를 최고의 하루로 바꿔줬다. 그러면서 ‘낭만’이라는 단어에 대해 깊이 생각해 봤다. 사전에서 찾아본 ‘낭만’의 의미는 이렇다.
 "현실에 매이지 않고 감상적이고 이상적으로 사물을 대하는 태도나 심리. 또는 그런 분위기."
이 의미에 대해 크게 공감할 수가 없었다. 어쩌면 이 사전을 쓴 사람이 낭만을 제대로 느껴보지 못해봤나 싶기도 했다. 그래서 나만의 ‘낭만’의 정의를 내려보고 싶어졌다. 나는 언제 ‘낭만적’이라고 느끼는가? 곰곰이 떠올려봤다.



#1

고등학교 때 가장 친한 후배와 함께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예술의 전당에서 공연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때는 스마트폰도, 유튜브도, SNS도 없던 시절이라 공연을 직접 볼 수 있을 거란 기대조차 하지 않았다. 그저 리허설이라도 공연장 밖에서 엿들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학교를 마치고 예술의 전당으로 향했다. 참고로 우리는 부산에서 학교를 다녔다.

공연을 보기 위해 학교를 조퇴하고 부산역에서 KTX를 타고 서울역에 내려 예술의 전당까지 갔다.
하지만 리허설조차 초대받은 사람만 볼 수 있었다. 우리는 공연장 밖에 있었지만 닫힌 문짝 너머로 미세하게 들리는 멜로디만으로도 충분히 감격스러웠고, 굳게 닫힌 문짝 너머지만 같은 공간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감은 충분했다.

그때, 리허설이 한창 진행 중인데도 안에서 나오던 두 사람이 보였다. 우리는 간절한 마음으로 다가가 물었다.

"혹시 집에 가시는 거면, 저희에게 초대권을 주실 수 있을까요?"

다행히 그분들은 우리에게 한 장씩 초대권을 건넸다.

그 초대권을 건네받은 순간은 아직도 생생히 기억난다. 너무 신나고 놀라서 뛰어가다 앞에서 오는 사람을 못 보고 크게 부딪혔다. 그 사람에겐 너무 미안하지만 나는 함박 미소를 숨기지 못한 채 말로만 죄송하다고 하며  고개를 몇 번이고 숙여 사과를 했다. 그리고는 사과를 제대로 받았는지 확인도 못한 채 공연장으로 뛰어들어갔다. 예상치 못한 행운으로 사이먼 래틀이 지휘하는 베를린 필하모닉의 리허설을 볼 수 있었다.
고등학교 내내 동경하던 오케스트라였다. DVD로만 보던 그들의 연습 장면을 직접 눈앞에서 보다니...

지휘자와 연주자의 연주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들의 눈빛, 제스처, 악기를 만지작거리는 작은 습관, 중간중간 주고받는 가벼운 농담까지... 모든 순간이 대단해 보였고, 한순간도 놓치고 싶지 않아 숨도 죽인 채 바라봤다.

리허설이 끝나고 우리는 객석 아래에서 지휘자와 연주자들의 이름을 불렀다.(당시 연주자들의 이름을 다 외우고 있었다...) 그들은 대답해 주었고, 악수도 해 주었다. 심지어 사진도 같이 찍어 주었다.
그 사진을 싸이월드에 자랑스럽게 올렸던 기억이 난다.

정말 낭만적인 순간이었다.

연주자의 꿈을 꾸던 고등학생 두 명이 막연한 기대만으로 서울까지 올라가서 우여곡절 끝에 공연장에 들어가고, 감격적인 순간을 만끽하고, 사진까지 남겼으니 말이다.


#2

20대 초반, 친구들과 포장마차에서 술을 마시던 날도 떠오른다. 안주 한두 가지를 시켜놓고 소주를 정말 엄청 마셔댔다. 야외에서 마셔서 그런지 취하지도 않은 듯한 느낌이었다.
중학교 시절 누가 누구한테 까불다가 맞았느니, 꼬봉이였느니 하는 왜곡되고 서로 다른 기억들을 안줏거리 삼아 배꼽 빠지게 웃었다. 그러다가 또 누가 결혼하면 TV를 사 주겠다느니, 냉장고를 사 주겠다느니 철없는 이야기도 했다.

맥락 없이 이어지는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고 심지어 중학교 교가를 목청껏 불러대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민폐도 그런 민폐가 없다. 하지만 그 순간만큼 세상은 그 테이블에 함께 하고 있었던 친구들과 나의 것이었다. 결국, 옆자리에서 조용히 혼자 술을 마시던 아저씨께 크게 혼나기도 했다.

정말 낭만적인 순간이었다. 혼났지만 기분 나쁘지 않았고, 우리가 너무 시끄럽고 민폐 끼친 걸 알고 인정하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2012.10.29 천호동 포장마차


돌이켜 보면, 낭만적인 순간은 언제나 완벽하지 않았다. 오히려 부족했지만, 그 속에서 충만함을 느꼈다.
그리고 다신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이기에 더욱 낭만적으로 기억된다.

나에게 기억과 추억과 낭만적 순간은 분명하게 구별된다. 기억은 단순히 지나온 사실을 떠올리는 것이라면 추억은 지나온 사실에 감정이 더해지는 것, 낭만적 순간은 지나온 사실에 감정과 아련함, 다신 못 돌아가는 순간이라는 특별함 등이 함께 있는 것 같다.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없고, 때로는 비효율적이지만 그렇기에 낭만이 되는 순간들도 있다.


고급 호텔의 뷔페와 와인도 좋지만, 때로는 허름하지만 누추하지 않은 정감 있는 식당에서 연탄불에 구운 삼겹살과 소주가 더 간절할 때도 있는 법이다.


자기만의 ‘낭만’을 정의해 보자.

다가올 낭만적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다가온 낭만을 충분히 느끼며 그 찰나의 순간이 최고의 하루가 되는 경험을 자주 하길 바란다.


낭만의 순간을 놓치지 않는 사람이 결국, 가장 낭만적인 삶을 사는 게 아닐까?

이전 17화 말하는데 왜 자꾸 끼어들어?

브런치 로그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