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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m maum Nov 14. 2024

아름다운 선순환 속 '나'

나와 네가 함께 행복하게 사는 방법

나는 중학교에서 음악을 가르치고 있다. 그런데 수업 시간에 음악 대신 수학이나 영어 문제집을 풀고 싶어 하는 학생들이 있다. 그 학생들이 음악 수업을 무시하거나 음악을 싫어해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수학과 영어를 잘하는 것만이 미래에 행복을 가져다줄 거라는 막연하고도 강한 믿음 때문인 듯하다. 특히, 부모님이나 학원에서 혼나기 싫어서 억지로 공부하거나 답지를 베끼는 학생들을 보면 마음이 아프다.


나는 공부를 잘하면 행복해질 수 있다는 가정과 전제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는 이야기를 해주고 싶다. 이 사회가 흔히 말하는 성공한 삶은 공부를 잘해서 좋은 대학에 가고, 좋은 직장에 취업해 돈을 잘 벌고, 조건이 맞는 배우자와 결혼해서 자녀를 낳고, 그 자녀를 자신처럼 키워내는 과정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이러한 과정이 틀렸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 속에 삶의 중요한 것이 많이 생략되어 있다는 점을 이야기해보고 싶다. 아무도 생략된 중요한 삶의 가치를 알려주지 않기에, 그리고 이를 배울 기회가 없기에 이렇게 한 번쯤 생각해 볼 수 있기를 바라며 이 글을 쓴다. 특히 어린 학생들에게 꼭 전하고 싶다.


우리는 흔히 행복이 무엇인지, 어떻게 하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지 모르면서 막연한 행복을 좇아 남들이 하는 노력을 맹목적으로 따라가는 경우가 많다. 진정으로 행복이 무엇인지, 내가 언제 행복한지를 정확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대부분 사람들은 기분이 좋으면 행복하고, 기분이 나쁘면 불행하다고 느끼기 쉽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행복해질 수 있는지, 또 불행할 때는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지를 정확히 알아차리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다면 행복이란 무엇일까? 사람마다 행복을 느끼는 순간은 다르겠지만, 나는 '인류애가 충전되고 마음이 따뜻함으로 가득 찰 때' 행복감을 느낀다. 어떤 사람은 돈이 많으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하여 돈과 행복의 관계를 맹신하며 살아가기도 한다. 여러 책이나 심리학 연구 결과에 따르면, 돈과 행복의 상관관계는 전혀 없지는 않지만 일정 소득 수준을 넘어서면 그 관계를 느끼기 어려워진다고 한다. 그리고 돈의 크기만큼 행복의 크기가 정해진다면,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부터 가장 가난한 사람까지 행복의 순위를 매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러 사례를 보면, 부와 명예를 가진 사람들 중에도 우울증을 겪거나 중독성 약물에 의존하는 경우가 있다. 반면 가난하지만 그 삶 속에서 의미를 찾고 행복하게 사는 사람들도 있다. 돈이 행복에 영향을 줄 수는 있지만, 절대적인 기준은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행복의 정의를 항상 유쾌하고 즐거운 감정만을 이야기하기보다 한 차원 더 넘어서서 생각해 보길 바란다. 내가 생각하는 행복의 범주에는 인류애와 충만감을 느끼는 것뿐만 아니라, 어렵고 고통스러운 순간에도 그 고통을 억지로 밀어내지 않고 잘 견뎌내면서 다음에 찾아올 행복을 기다리는 것 역시 포함한다. 삶은 항상 봄일 수 없고 추운 겨울을 겪어봐야 따뜻한 봄이 더욱 따뜻하게 느껴지지 않을까?


영원한 행복도 영원한 불행도 없다. 행복한 순간에는 그 순간을 충분히 만끽하고, 불행한 순간에는 지혜롭게 잘 넘기며 반드시 찾아올 다음 행복을 기다리면 된다.


자,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행복을 느끼며 살아갈 수 있을까?


행복을 느끼며 사는 방법에 대한 인사이트는 개그맨이자 작가인 고명환 님의 강연과 그동안 읽은 수많은 책들, 그리고 내 주위에 있는 선한 영향력을 가진 소중한 사람들과의 따듯한 대화에서 얻은 것들이 조각조각 맞춰지며 머릿속에 하나의 크고 뚜렷한 그림으로 남았다.

맹자가 말한 '유자입정'과 그리스인 조르바의 이야기 속 “나를 구원하는 유일한 길은 남을 구원하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다. '유자입정'은 우물가를 지나가는 아이가 우물에 빠지려는 모습을 본다면 누구나 아이가 빠지지 않도록 도우려는 마음을 가질 것이라는 뜻이다. “나를 구원하는 유일한 길은 남을 구원하는 것이다”라는 말도 같은 맥락이다. 꾸준히 봉사활동을 하거나 익명으로 거액을 기부하는 사람들도 있다. 앞서 얘기한 유자입정, 그리스인 조르바, 봉사활동, 기부는 공통점이 있다. 첫째, 누군가에게 인정받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고, 둘째, 물질적으로 내 삶에 도움이 되지 않으며, 셋째, 그 일을 하는 사람이 행복을 느낀다는 점이다. 그들은 타인을 위한 일에서 충만함을 보상으로 느끼고, 그것이 또다시 다음 선행의 동기가 된다. 나는 이것을  ‘아름다운 선순환’이라 표현하고 싶다.


예전에 보았던 두 가지 뉴스 인터뷰가 기억난다. 하나는 봉사활동을 꾸준히 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꾸준히 봉사할 수 있냐고 묻자 “내가 좋아서 하는 거예요”라고 답한 짧은 인터뷰였다. 이 말속에 앞서 설명한 모든 내용이 담겨 있다. 또 다른 뉴스에서는 출근 시간 지하철에서 장애를 가진 분들이 평소 불편함 호소할 때 출근길에 오른 많은 사람들이 지하철 연착으로 불편함을 느끼고 불만을 가진다는 내용이 나왔다. 나는 그 뉴스를 보고 장애를 가진 분들의 목소리가 많은 사람들의 불편함의 목소리 때문에 감춰질까 봐 걱정이었다. 그래서 그분들의 목소리를 전달력 있게 전달할 다른 좋은 방법은 없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이와 관련해 한 시민분의 인터뷰에서 엄청난 배려와 감동을 느끼고 반성했는데 그분이 말씀하시길 “저는 오늘 하루 잠시 불편하지만 저분들은 평소에 얼마나 불편하시겠어요? 저희가 이해해야죠”라고 말씀하셨다. 이 짧은 대답에 내가 생각한 것도 저분들의 불편함을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했구나라는 반성을 했다.


이처럼 이타적인 삶, 남을 돕고 구원하는 삶이 행복한 삶으로 가는 길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순수한 마음으로 남이 잘되기를 바라고, 고통받지 않기를 바라며 세상을 따뜻하게 대한다면, 내 주변이 행복해지고 나 역시 행복해질 수 있다. 이 개념은 불교의 '사무량심'에서도 나온다. 더 깊이 알고 싶다면 사무량심 중 자애, 연민, 더불어 기뻐함(자, 비, 희)에 대해 공부해 보길 추천한다.


하지만 여기서 한 가지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내 삶이 무너져가면서 남을 위해 살아가라는 것이 아니다. 이타적으로 남을 돕기 위해서는 나 자신을 먼저 사랑하고 긍정적으로 바라보며, 스스로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여기서 자신을 사랑한다는 개념 또한 오해하지 말자. 나를 둘러싼 주변 상황이나 다른 사람들에 대한 이해 없이 자신만을 생각하는 나르시시즘이나 이기적임과 분명히 다르다. 이타적인 마음으로 타인을 돕고 세상을 대할 때 그 따뜻한 마음이 다시 나에게 부메랑처럼 돌아오게 되어있다.


그리고 이타적으로 진심을 다해 남을 도울 때 부와 명예가 뒤따를 수 있다고 고명환 님은 자신의 경험을 통해 이야기했다. 하지만 부와 명예는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것이며, 그것만이 목적이 되어 중요한 가치를 잃어서는 안 된다. 말 그대로, 부와 명예는 행복하게 살아가는 데에 ‘부차적’인 것이어야 한다. 부와 명예가 따르지 않더라도 내 삶이 충만하고 행복하다면 그걸로 이미 성공한 삶이 아닐까?


이 세상은 서로 깊은 인연으로 이루어져 있다. 같은 지구, 같은 나라, 같은 도시에서 살아가며 비슷한 환경을 공유하는 사람들과의 인연 속에서 따뜻함을 주고받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삶은 충만해질 것이다.


자신을 사랑하고 감사하며 남을 구원하는 이타적인 삶. 그 아름다운 선순환 속에 자신의 삶을 던져보자. 나와 내 주변이 따뜻한 온기로 가득 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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